일반적으로 신부는 친정에 머물다가 시집으로 가게 되는데 시집의 형편에 따라 친정에서 달을 묵히거나 해를 묵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신랑이 신부와 함께 시집에 가는 것을 ‘우귀(于歸)’라 한다. 시집에 온 신부는 사위가 처가에서 받은 큰상에 해당하는 신부의 ‘큰상’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은 시집에서 신부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공식적인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신부가 시집의 며느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신부는 시부모에게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올린다. 이것은 오늘날의 폐백에 해당된다.
예서에서 신부가 화관(花冠)에 염의를 입되 현구고례에는 선 장식(緣)을 제거하여 사용한다고 하니 곧 ‘소의’를 말하는 것이다. 소의가 없으면 대의·장군을 입어도 무방하다고 한 것은 곧 결혼한 여성의 예복을 입으라는 것이므로 세속의 녹원삼을 말한다.
현구고례를 할 때 신부는 관례를 치르는 것이 관행이었다. 시아버지는 사모에 단령을 입고 시어머니는 화관에 원삼을 입는데 신부 역시 화관에 낭자머리를 하고 원삼을 입었다. 여러 층으로 만든 통군(桶裙)이라고 하는 무기지 속치마를 입고 그 위에 홍치마, 그리고 다시 그 위에 자주색에 남색 안감을 댄 슬안호(膝按帍)라고 하는 겹치마를 입었다.232)문옥표 외, 『조선시대 관혼상제』 1: 관례·혼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181∼182쪽. 『거가잡복고』에는 시 집에서 체(髢)를 준비하여 신부 머리에 얹어 주는데 세속의 ‘신부 관례’라고 하는 것으로 이때 홍장삼을 입는다고 하였다.233)박규수, 조효순 옮김, 앞의 책, 150쪽.
개화기에도 시집에 가서 폐백을 드릴 때 관례를 함께 하였다. 폐백을 드릴 때는 원삼을 입었는데 관례를 치를 때는 어여머리에 연두저고리와 다홍 치마를 입고 원삼 위에 다시 활옷을 입었다.234)한상숙, 앞의 책, 58∼59쪽. 현구고례를 올릴 때는 결혼한 부인의 성장인 녹원삼을 입고 어른들께 인사드리는 것이 예서의 원칙이지만 혼례 전에 치러야 할 관례를 이때 치르기 때문에 다시 혼인 때의 예복인 홍장삼, 즉 활옷을 입기도 하였다.
20세기 초, 시부모께 폐백을 드리는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235)경운 박물관, 『근세 복식과 우리 문화』, 2003, 64쪽. 시어머니는 족두리에 원삼을, 그리고 며느리는 족두리와 도투락댕기에 활옷을 입고 있다. 시어머니 옆에 앉은 시아버지는 조복을 입고 있는데 개화기에는 폐백을 드릴 때 시아버지는 조복을 입는 것이 유행이었다. 조복이 없는 집안에서는 종로에 있던 주단 집에서 빌려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