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4. 장수의 기쁨, 수연례복과 회혼례복
  •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수연례
이은주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장수(長壽)를 오복(五福) 중에 으뜸으로 여겼다. 사례(四禮)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경수연(慶壽宴), 기로연(耆老宴) 등을 열어서 큰 경사를 축하하였다.

전통 사회에서는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를 기준으로 한 60년 주기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출생한 해와 같은 간지의 해가 되돌아오는 것을 회갑(回甲)이라 하여 큰 잔치를 베풀곤 하였다. 회갑은 물론 혼례를 치른 지 60주년이 되는 해에는 회혼례(回婚禮)를, 또 과거 급제한 지 예순 돌을 맞아 회방(回榜) 모임을 갖는 것도 60주년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236)『숙종실록』 권63, 숙종 45년 1월 계미.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은 삼회대(三回帶)라고 불리는 서대(犀帶)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회갑·회혼·회방에 둘렀던 띠를 말한다. 사람들은 이를 복대(福帶)라고 부르면서 혼사를 치르는 자들이 서로 빌려 가기도 하였다.237)이유원(李裕元), 『임하필기(林下筆記)』 권26, 「삼회대(三回帶)」. 장수를 해야만 누릴 수 있는 회갑·회혼·회방의 삼회(三回)에 서대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주인공이 각 행사에 사모관대를 착용하 였음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민노행(閔魯行)의 회갑에 79세의 모친이 녹색 관복(綠朝衫)에 짙은 녹색 창의를 만들어 주었으며,238)이유원, 『임하필기』 권31, 「민문백세노부인」. 『쇄미록』에는 오희문이 어머니 생신에 모시 적삼을 올리고, 자신의 생일이나 회갑에는 이웃과 함께 간소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였다.239)오희문, 이민수 옮김, 『쇄미록』 상, 제4, 454쪽. 이와 같이 집안 형편에 따라 다양한 수준으로 행사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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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연에 참여한 노부인들과 자제들
경수연에 참여한 노부인들과 자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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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수연도첩(慶壽宴圖帖)」을 통해 1605년(선조 38) 4월에 열린 경수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240)서인화 외, 『조선시대 음악 풍속도』 Ⅰ, 민속원, 2002, 100∼107쪽. 『경수연도첩』은 임진왜란 직후 장수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재상들이 노모를 위해 경수연회를 열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대부인(大夫人) 열 명과 차부인(次夫人) 열 명, 진흥군 강신(姜紳)을 포함한 13명의 계원과 입시 자제(入侍子弟) 일곱 명이 함께 모인 자리이다. 참석한 20명의 대부인과 차부인들은 치마저고리 위에 붉은 선 장식이 있는 아청색 예복을 입고 붉은색 관모를 쓰고 있다. 대부인의 아들들이 상수(上壽)를 마치고 짝을 이루어 춤을 추고 있는데 꽃 꽂은 사모에 관리의 집무복인 홍단령을 입고 흑화를 신고 있다. 각 댁에서 온 시비들과 나이든 의녀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수연을 돕고 있으며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은 복두에 홍포를 입고 있다.

개화기 사진 중에는 회갑 때 찍은 것이 더러 눈에 띄는데 주인공과 하객의 옷차림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즉, 주인공이나 하객 모두 외출복 정도로 입을 만한 평상복을 깔끔하게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에 안동 풍천면 가일 마을의 안동 권씨 집안에서 치러진 회갑잔치 사진을 보면 큰상을 받았는지 여부만 다를 뿐, 갓과 도포 등을 차려입은 모습은 주인공이나 하객 모두 마찬가지임을 볼 수 있다. 참석한 젊은 사람들은 ‘하이칼라’라고 하는 서양식 머리를 하고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 어른들과 구분되는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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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의 회갑잔치
1933년의 회갑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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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는 경우에는 본인의 회갑에 어린이들이 입는 오방장두루마기에 전복과 복건을 입는 풍습이 있었다. 부모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사랑스러운 자식일 뿐이다. 이는 초나라의 효자 노래자(老萊子)가 일흔 살의 늙은 나이에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어린아이의 옷을 입고 장난을 즐겼다 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는 그와 같은 용도로 입었던 남자 어른용 오방장두루마기가 있다. 복건을 쓰고 두루마기 위에 전복을 덧입었다. 그 밖에 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도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尹伯榮) 여사가 회갑 때 어머니의 무릎에 안겨 어린이로 돌아가는 노래자 의식을 하면서 입었던 색동마고자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때 굴레도 함께 썼다241)단국대학교 석주선 기념 박물관, 『명선』 하, 2005, 169쪽.고 하니 회갑 옷이 돌복과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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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에 입은 오방장두루마기
회갑에 입은 오방장두루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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