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5. 저승길에 함께하는 수의
  • 수의 사용의 원칙
이은주

수의는 죽은 이나 후손들의 신분에 따라 좌우되었다. 우선 예서에는 신분에 따라 수의의 사용량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국왕은 9칭(稱)을 사용하고 대부(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5칭, 5품 이하는 3칭으로 규정하면서 옛 제도를 따르고자 하였다. ‘대부 5칭’에 ‘사인 3칭’ 이라는 원칙을 반드시 지킨 것은 아니며 신분이 높을수록 많은 양의 옷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죽은 이의 신분은 수의에 사용하는 옷가지의 수와 가장 겉에 입히는 상복(上服)을 통해 나타냈다. 후기에는 심의를 기본으로 하되, 단령과 직령 등을 신분에 따라 수의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대체로 문관은 심의를 쓰고 무관은 단령을 쓰는 경향을 보였다. 그 밖에 수의에 사용하는 소재에서도 신분이 나타났다. 많은 조선시대의 예서에서는 면주나 증 등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실제 고위 관직을 지낸 이들의 묘에서 출토된 수의에는 단(段) 종류의 고급 직물이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 이전에는 평상복을 수의로 사용하였다. ‘평상복 수의’는 대부분 무늬가 있는 비단 종류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또 옷마다 다른 종류의 옷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윤달 수의’를 입혔으며, 수의를 새로 만들 때는 무늬 없는 공단을 획일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익정의 수의243)고부자, 「상암동 출토 전주 이씨 익정(益炡(1699∼1782)) 유물 연구」, 『한국 복식』 19, 2001, 100∼101쪽.와 19세기 후반 이연응의 수의244)이은주, 「이연응 묘의 출토 복식에 대한 고찰」, 『전주 이씨 묘 출토 복식 조사 보고서』, 경기도 박물관, 2001, 308쪽.는 공단으로 제작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는 앞 시대에 비해 전체적으로 옷의 치수가 줄어들고 몸에 맞는 양식이 유행하면서 옷이 작아져 생전에 입었던 본인의 옷을 수의로 사용하기에 불편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수의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는 습속이 형성되었는데 윤달에는 모든 일을 꺼리지 않기 때문에 혼인하는 것도 좋고 수의를 만드는 것도 좋다245)홍석모(洪錫謨),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윤월(閏月).고 하였다. 그리고 『숙종실록』에는 그와 관련하여 “삼가 무강(無彊)의 수(壽)를 기원하며 윤월 의대를 일찍이 만들어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윤달에 수의를 미리 준비하면 장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요즈음도 윤달이 들면 수의를 장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수의를 만들 때에는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실을 바느질 도중에 잇거나 그 끝을 옭매지 않는다는 등의 금기246)조효순, 『한국 복식 풍속사 연구』, 일지사, 1988, 313쪽.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죽은 이에게 수의를 입힐 때는 산 자와 같은 방식으로 옷을 입히는 우임(右衽) 원칙이 있다. 우임은 왼쪽 앞자락을 오른쪽 앞자락 위에 덮는 것을 말한다. 즉, 왼쪽 자락의 가장자리가 오른팔 쪽으로 오는 것으로, 현재 남자들 상의 여밈 방식과 같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거두었는데도 후손들에게는 다시 회복되어 살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여전히 산 사람들의 옷 입는 방식, 즉 ‘우임’으로 수의를 입히는 것이다.

곧이어 소렴(小斂), 대렴(大斂)이라는 단계를 거치는데, 소렴부터는 단념의 뜻으로 생시와는 다른 좌임(左衽) 방식으로 여몄다. 대·소렴 단계에서는 죽은 자가 이승으로 영영 돌아오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산 사람들이 입는 방식과는 반대의 방향인 좌임으로 옷을 여몄던 것이다. 이불로 시신을 쌀 때도 마찬가지이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을 여밈의 방향에 두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수의 품목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였다. 수의란 좁은 의미에서 죽은 자에게 입히는 옷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옷 외에 관모나 신발도 포함되며, 얼굴을 가리는 멱목(幎目)이나 손을 감싸는 악수(幄手), 귀를 막는 충이(充耳)까지, 즉 머리에서 발끝까지 시신을 덮고 싸는 데 사용되는 물품 전체를 말한다.

조선 전기의 복식 제도가 반영된 『국조오례의』에는 대대, 흑단령, 답호, 철릭, 과두, 한삼, 고, 말, 망건, 복건, 충이, 멱목, 악수, 신발 등이 제시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예서라고 할 수 있는 『사례편람』에는 중국 제도를 권장하는 이상론과 함께 당시의 제도를 참조한 복식류를 제시하였다. 더욱이 실학적 사고를 지녔던 안정복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수의를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수의의 구체적인 구성물은 시속에 따라 변화하였다. 수의 중 웃옷에 해당되는 상복에서 시대적 변화를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남자 수의의 경우, 조선 전기와 중기에는 주로 흑단령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심의를 수의의 웃옷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여자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아청색 단령이 수의로 많이 출토되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예서에서도 확인되듯이 주로 원삼이 수의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수의는 시대적인 변화를 적절히 수용하면서 당시의 실정에 따라 변화하였다. 조선 후기의 남녀 수의의 대표적인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확대보기
이응태의 수의 착장 모습
이응태의 수의 착장 모습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