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4장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의례복
  • 5. 저승길에 함께하는 수의
  • 여자 수의
이은주

여자는 남편의 품계에 따라 남편과 같은 수의를 입었다. 따라서 대부 5칭, 사인 3칭으로 수의를 사용하라는 규정은 여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착장 방법이나 순서는 남자 수의와 유사하다.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는 여자 수의의 종류를 확인할 수 없다. 단편적인 기록과 묘에서 출토된 사례를 통해 여자 수의의 종류를 살펴보면 웃옷으로는 아청색 단령이 가장 많고 장삼, 장옷 등도 사용되었다. 허리띠는 청주(靑紬)를 사용한다는 『국조오례의』 기록이 있으며, 출토된 유물로는 대대(大帶)가 있다. 그 밖에 소모자, 여모(女帽), 적삼, 단저고리, 장저고리, 밑 막힌 바지, 밑 트인 바지, 행전, 치마류, 버선, 습신, 멱목, 악수, 충이 등이 사용되었다.248)박성실 외, 앞의 책,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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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용 원삼과 대대
수의용 원삼과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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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편람』에는 머리 수건 ‘엄(掩)’과 머리싸개 ‘사(纚)’, 그리고 웃옷으로는 심의나 단의(褖衣), 원삼, 장옷 등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허리에 두를 띠, 저고리 3칭, 적삼(속저고리), 과두, 치마, 바지, 홑바지, 채혜(꽃신), 충이, 멱목, 악수, 버선 등을 사용하라고 되어 있다. 대부의 부인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5칭이어야 하는데, 적삼과 표의 외에 저고리 세 벌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간혹 당의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1722년(경종 2)에 사망한 의원군의 부인 안동 권씨 묘에서는 여모와 함께 커다란 솜족두리, 초록색 금직 원삼과 금선단 대대가 수의로 출토되었다. 원삼 안에는 당의와 저고리 두 벌, 적삼을 입었다. 1789년(정조 13)에 사망한 한양 조씨의 경우에는 원삼 안에 초록색 곁마기와 옥색·보 라색 저고리, 단삼이 사용되었으며 1915년에 사망한 한산 이씨의 경우에도 원삼에 당의 한 점, 저고리 세 점, 단삼(백공단)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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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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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류에는 치마와 바지가 있는데 안동 권씨는 비단 홑바지에 비단 솜바지를 사용하였으며, 한양 조씨도 마찬가지로 홑바지에 겹바지를 겹쳐 사용하였다. 그러나 안동 권씨나 한양 조씨보다 시대가 늦은 한산 이씨의 경우는 백공단 홑바지와 겹바지 위에 다시 백공단 너른바지 한 점을 더 추가하였다. 속속곳에 바지를 입고 그 위에 단속곳을 입은 것이다.

치마 두 점을 겹쳐 입는 것이 조선 후기 예복 치마의 일반적인 착장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89년의 상례 기록(한양 조씨)에서도 이미 홍상과 청상이 사용되었는데 『광례람(廣禮覽)』에서도 홍색과 청색이 제시되고 있으며 한산 이씨의 『신종록(愼終錄)』에서도 홍공단과 남공단 치마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청상과 홍상을 사용하는 관습은 오래전부터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재는 문단이나 공단 등이어서 역시 견직물류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버선과 신발은 당시에 신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남자의 경우처럼 수의 일습으로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발은 생시에 신던 비단신(采鞋)이 있으면 쓰라고 하였다. 안동 권씨는 겹으로 제작한 문단 습신을 사용하였는데, 한양 조씨와 한산 이씨는 모두 홍색 계통의 공단 신발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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