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5장 전통 사회의 패션 리더들
  • 3. 사대부가의 차림새
  • 패딩과 퀼팅의 멋스러움
이민주

매 시즌마다 수많은 디자이너에 의해 다양한 패션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21세기에도 패션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소재의 개발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의복이 멋스러워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목면 문화 시기’와 더불어 ‘견직물의 새로운 유형’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목화는 본래 고온 다습한 지역에서 자라는 특성 때문에 중국에서도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 재배되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초면인 목화씨를 들여온 뒤 1365년(공민왕 14)에 하얀 꽃을 피웠으며, 그 뒤 조선 세종 때 북방 면업 확장 정책을 적극 추진하면서 면직물은 마포를 대신하여 의복의 소재 가운데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297)김소현 외 3인, 『19세기 조선, 생활과 사유의 변화를 엿보다』, 돌베개, 2005, 92∼93쪽. 더구나 임진왜란 직후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정부에서도 사치성 직물인 고급 필단보다는 생산이 쉬운 면포를 적극 장려하였다.

그러나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경제가 회복 기미를 보이자 다시 상류 계층에서는 비단옷을 선호하게 되는데 그 유형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옷감 전체에 연꽃무늬나 구름무늬가 가득한 전형적인 화문단이 대부분이었던 16세기에 비하여 17세기부터는 새로운 유형의 견직물이 등장하였다. 특히, 평견직물을 누빔하여 줄무늬 효과를 나타낸 옷감을 매우 선호하였고 항라와 같이 가로줄이 나타나는 익조직도 새롭게 나타났다. 또한, 흔히 추사(皺紗)라 하는 주우사(注雨紗)와 같은 독특한 질감의 평견직물도 많이 출토되었다.298)조효숙, 「김여온(1596∼1665) 묘 출토 직물에 관한 연구」, 『대한 가정학회지』 44권 1호, 2006, 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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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질서와 규율이 강조된 사회 분위기의 영향으로 사대부들은 화려한 문단보다는 절제되고 정갈한 느낌이 나는 직물을 더 선호하였을 것이다. 또한, 생산 기술면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부분의 고급 직물을 상의원에 소속된 장인들이 제직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관장제 수공업이 약화되면서 견직물 생산도 많은 부분이 민간 수공업으로 넘어 가게 되었다. 따라서 민간 수공업에 소속된 장인들은 굳이 제직하기 어려운 화문단을 생산하기보다는 제직이 단순한 직물을 생산하 였을 것이다.299)안동대학교 박물관, 『17세기의 무관 옷 이야기』, 민속원, 2005, 178∼179쪽.

이응해(李應獬, 1547∼1626) 장군 묘에서 출토된 창의류의 누비 간격이 1.5㎝에서 2.2㎝, 2.5㎝, 5㎝, 15㎝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동래 정씨(東萊鄭氏, 1574∼1669) 일가의 출토 유물 중 1.6㎝로 정교하게 누빈 중치막이 출토되었으며, 병마절도사를 지낸 김여온(金汝溫, 1596∼1665)의 중치막은 누비 간격이 1㎝에서 1.2㎝, 2.5㎝, 3㎝, 12㎝까지 다양하게 보이고 있다. 또한, 중치막뿐 아니라 배자, 소창의, 저고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누비 간격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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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 철릭
솜 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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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해 장군 묘 출토 복식은 다양한 간격의 누비와 함께 솜을 두었는데 솜의 두께도 얇은 것에서부터 두꺼운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동래 정씨 정휴복(鄭休復, 1529∼1604)의 철릭과 전주 이씨 밀창군(密昌君, 1677∼1746)의 출토 유물에서도 솜을 둔 창옷, 중치막이 발견되었다. ‘소빙기’라고 할 정도로 추위가 극심했던 17세기 당시 패딩 처리한 옷은 가볍고 따뜻하여 겨울옷으로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솜의 두께를 달리하여 만든 패딩이나 솜을 두고 누빈 것, 또는 솜은 두지 않고 겹으로 누빈 것 등 다양한 유형의 옷감이 유행하였으며, 청나라에서는 예물로 누비옷을 항시 바치게 하였다300)『연행록선집』, 「부연일기」, 주견제사, 방적.고 하니 소재와 구성의 단순함을 뛰어넘은 창의적인 소재 개발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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