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
  • 1. 머리치장
  • 남성용 헤어밴드 망건
송미경

조선시대 남자는 머리를 어떻게 정리하였을까? 먼저 머리카락을 정리하여 머리 위에 상투를 튼 다음 상투의 꼭대기 부분에 동곳을 꽂고, 흩어져 내린 머리카락은 살쩍밀이라는 얇고 작은 막대기로 밀어 넣어 망건을 단단 히 둘러매고 당줄을 관자에 걸어서 상투에 동여매었다. 망건은 서양의 헤어밴드와 같은 목적으로 뒷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하여 갓 바로 밑 이마에 밀착시켜 묶는 띠의 일종이다. 망건은 말총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엮을 때 무늬를 넣어 짜기도 하였다. 너비가 3.8㎝ 정도인 망건을 이마의 중간쯤까지 내려서 머리 주위에 동인 다음 돌려서 뒤로 단단하게 묶기 때문에 매우 아프고 이마 주위에 깊이 자국이 남는다. 한 계절이 지나면 영원히 자국이 남는데, 거의 머리 주위에 3㎜ 정도의 자국이 생긴다. 처음 망건을 착용하게 되면 두통이 올 정도로 고통이 심하지만 한 달쯤 쓰고 나면 아픔도 가시고 멋진 갓이나 관을 쓸 수 있는 완벽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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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창대군의 망건
능창대군의 망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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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작은 뼈나 조개껍질을 이용하여 자그마한 칼처럼 만든 살쩍밀이는 원래 몸단장 용구로 머리가 흐트러졌다거나 삐쳐 나왔을 때 머리칼을 밀어 넣어 모양을 고정시키는 데에 썼다. 그러나 머리가 심하게 아플 때 망건 밑으로 집어넣어 조임을 완화시키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336)이민주, 「외국인의 눈에 비친 개항기 복식 문화」, 『한국 의상 디자인학회지』 7권 1호, 2005, 104∼105쪽.

조선시대의 많은 장신구가 대부분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에서는 오히려 조선의 망건을 더 선호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얇은 비단 종류인 사(紗)에 검정 칠을 한 중국의 망건은 상투 부분만 뚫려 있는 모자 형태였다. 이것이 조선에 들어와 이마만 묶는 밴드 형태의 조선식으로 바뀌었다. 결국 17세기 이후에는 조선식 망건이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유행하였다.337)최남선, 『조선 상식』, 대양 서적, 1948, 111쪽.

옷감으로 만든 망건은 땀이 쉽게 배여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덤에서 출토된 망건 가운데 말총으로 만든 망건도 있다. 1999년 여름 전주 이씨 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 종중(宗中)의 무덤을 이장할 때 수습된 능창대군(綾昌大君, 1599∼1615)의 망건은 조선시대 망건 중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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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건 흔적
망건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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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손자이며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광해군의 시기를 받아 1615년(광해군 7) 신경희(申景禧)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는 무고로 강화도에 귀양을 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인조반정(1632) 이후 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능창대군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인평대군이 양자로 입양되었다. 능창대군의 묘는 경기도 하남 춘궁동에 있었는데, 이장할 때 바닥에서 죽순처럼 말려 있는 망건 한 점을 발견하였다. 두 단으로 되어 있는 이 망건의 양옆에는 옥으로 만든 꽃을 새긴 작은 관자 한 쌍이 있다. 이 망건은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젊은 영혼을 보는 듯 매우 단아하여 조선 왕실의 기품과 멋을 간직하고 있다.

망건은 1895년 단발령 이후, 상투가 사라지면서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서는 많은 사람들이 1910년 이후에도 상투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조선 총독부에서 실시한 인체 계측(人體計測) 사진을 보면 망건을 벗은 상태로 상투를 하고 있으나, 수십 년간 망건을 착용한 흔적이 이마 위에 나타나 있다. 망건으로 조였던 부분이 햇빛을 받지 못해 하얗게 드러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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