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
  • 1. 머리치장
  • 더 멋진 망건을 위하여
송미경

망건은 남자들의 장신구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망건을 착용하기 위하여 함께하는 장신구로는 망건을 조이는 관자와 망건의 앞 중심에 달아 갓이 넘어가지 않게 지지대 구실을 하는 풍잠이 있다. 그 밖에도 동곳과 살쩍밀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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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와 풍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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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는 망건의 귀 부근에 달려 있고, 양쪽에 달려 있는 당줄을 서로 끼어 넣어 조이는 역할을 하며, 관자의 장식과 재료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관자는 망건을 사용하지 않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대화에 종종 등장한다. 편두통이라든지 머리가 아플 때 민간요법에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라고 한다. 관자놀이란 관자가 놓이는 부분이다. 관자는 1·2·3품 당상관은 금이나 옥을 사용한다고338)『경국대전』 권3, 예전, 의장조. 되어 있으나, 이규경(李圭景, 1788∼?)은 “1품은 만옥(漫玉)으로 만든 속칭 옥환(玉環)을 하였고, 2품은 나팔꽃·매화꽃·외꽃 모양의 금관자를, 3품은 나팔꽃·매화꽃 모양과 여러 가지 꽃 모양의 옥관자를 하였다. 당하 3품 이하 서민은 대모(玳瑁), 양(羊)의 뿔, 소 발굽으로 만든 작은 관자를 사용하였으며, 서민 중 호사하는 사람은 호박이나 투명한 호박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다.”339)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망건환제변증설.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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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잠
풍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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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아들인 세손(정조)이 세자빈을 맞는 삼간택 날 신분에 맞는 작은 옥관자 대신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가 한다는 무늬가 조각된 큰 옥관자를 하여 아버지인 영조의 역정을 샀다. 결국 사도세자는 간택된 세손빈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혜경궁 홍씨는 “그 작은 물건이 무엇이기에”라고 관자에 얽힌 사연을 적어 놓았다.340)이은주 외, 『길짐승과 함께하는 17세기의 무관 옷 이야기』, 민속원, 2005, 160∼161쪽.

기록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지만, 실제 사용은 어떠 했는지 알 수 없다. 대부분 남아 있는 유물이 옥관자와 금관자이고 망건에 붙어 있는 관자도 드물지만 착용자의 신분과 연대를 알 수 있는 경우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옥으로 만든 관자를 보면, 매화꽃을 새긴 것과 세 갈래의 대나무 잎을 새긴 것, 그리고 동 위에 금도금을 한 것 등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붙어 있는 관자이지만 작은 것에도 신경을 쓴 세세함에 놀랄 따름이다.

풍잠은 망건의 앞쪽에 다는 장식품이다. 갓모자가 풍잠에 걸려 바람이 불어도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실용적인 용도가 있지만 멋쟁이 남성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 쇠뿔, 대모, 호패, 금패 등을 지름 4㎝ 미만으로 둥글게 또는 타원형,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 달았다. 투명한 말총 탕건 속에 비치는 황금색 풍잠은 부와 격을 말해 주는 잣대나 다름없었다.341)장숙환, 『전통 남자 장신구』, 대원사, 2003,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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