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
  • 1. 머리치장
  • 올림의 미학, 가체
송미경

조선시대 여자들은 혼인을 하면 머리를 땋아 머리 위로 둥글게 얹는데 이러한 머리 모양을 통틀어 얹은머리라고 한다. 조선 여인의 기본 머리 모양은 기혼일 경우 얹은머리와 쪽머리를 하였고, 미혼이면 땋은머리였다. 이 밖에 예장용 머리 모양으로 큰머리, 어여머리, 대수, 첩지머리, 새앙머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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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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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나 중기 여인의 머리 모양은 조반(趙伴, 1341∼1401) 부인의 초상화와 16세기 중반의 그림으로 알려진 호조낭관계회도(戶曹郎官契會圖), 1524년(세종 3)에 사망한 변수(邊修, 1447∼1524)의 무덤에서 출토된 나무 인형, 16∼17세기 무덤에서 나온 작은 백자 인형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17세기에 조성된 무덤에서 종종 가체(加髢)가 부장품과 함께 나오기도 한다. 18세기 초·중반 여인의 머리 모양은 윤덕희(尹德熙, 1685∼1766)의 독서하는 여인에서 볼 수 있는데, 이때는 올린 머리이나 풍성한 모습은 아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나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3 이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풍성한 머리는 대부분 가체였다.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을 보면 단옷날에 그네 뛰는 여인과 머리 감는 모습의 여인, 양 갈래로 1m는 족히 넘도록 땋은 머리를 만지고 있는 여 인이 있다. 이 정도의 머리를 해야 그림에 등장하는, 머리를 정리한 여인의 풍성한 머리 모양이 될 것 같다. 신윤복의 계변가화(溪邊佳話)는 개울에서 여인들이 빨래하고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던 활을 들고 있는 선비가 힐끗 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에서도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머리를 한참 땋고 있는 여인의 발치 아래 가채로 보이는 다리꼭지 세 개가 큰 짐 보따리 옆에 놓여 있다. 신윤복이 살았던 시기에는 가체가 매우 유행하였는데, 일반 여인들도 대부분 가체를 하여 머리를 아름답게 꾸몄던 듯하다. 짐 보따리의 무게도 무게이지만 가체의 무게 또한 매우 무거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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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풍정
단오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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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변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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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엽 평생 전족(纏足)353)중국에서 여자들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해 헝겊으로 묶던 풍습으로, 10㎝가 이상적인 성인 여자들의 발의 크기였다고 한다.을 한 한족(漢族) 여인들의 발 엑스레이(X-ray) 사진을 보면 심하게 비틀려 서양 사람들은 이러한 발 모습을 보고 ‘lily roots’라고 하였다. 발의 모습이 마치 백합의 뿌리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오늘날 잠자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 여인들을 깨워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면 태국 북부에 사는 소수 민족 카렌(Karen)족354)카렌족은 초경을 한 소녀들이 생일을 맞을 때마다 목걸이를 하나씩 걸어 주어 성인이 되면 목이 길게 변형된다. 현재는 법으로 금하였다. 여인과는 달리 목뼈가 가체 무게에 눌려 매우 짧아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여인들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 사극에 출연하는 배우 가운데 왕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은 가체를 하고 오래 견디는 일이라고 한다.

‘삼단 같은 머리채’, ‘구름 같은 허튼 머리’ 등의 조선 중기 이후 유행했던 윤기 나는 풍성한 얹은머리는 ‘가체’ 덕분이다. 가체는 오늘날과 같은 가발이 아니라, 남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본 머리카락과 함께 땋거나 둥글게 하여 모양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부잣집 여인들은 머리를 치장할 때 높이를 한 자(약 30㎝)나 되게 하였고, 모양은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 웅황판(雄黃版), 법랑잠(琺瑯簪), 진주(眞珠)로 꾸며 머리치장에 드는 비용이 무려 7∼8만 냥에 이르는 것은 물론 무게를 거의 지탱할 수 없게 하여355)이덕무, 『청장관전서』, 사소절, 부의편(婦儀編). 부작용이 매우 심각하였다. 당시에는 가체 1계(髻)의 값이 중인(中人) 열 가구의 재산 이상이라고 하였으니 요즈음으로 따지면 소형 아파트 열 채에 해당되는 고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가체가 고가인 것은 조선시대의 유교 윤리가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고 하여 머리카락을 매우 소중히 여겨 머리카락을 팔 수 있는 사람은 노비나 생활 극빈자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가체를 만들기 위한 머리카락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값도 값이지만 남자의 머리인지 여자의 머리인지도 모르는 것을 여염집 여인들이 머리카락을 섞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가체를 금해야 한다는 상소도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폐해가 심해지자 1756년(영조 32)에 양반 부녀자의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도록 명하였고,356)『영조실록』 권87, 영조 32년 1월 갑신. 1757년 11월에 젊은 사람은 족두리를 쓰고 늙은 사람은 다리를 썼으며,357)『영조실록』 권90, 영조 33년 11월 기유. 얹은머리는 금하고 궁중 양식, 즉 족두리는 허락하고 그 밖의 양식은 모두 금지하였다.358)『영조실록』 권91, 영조 34년 1월 경자.

그러나 정조대까지도 가체에 대한 법령이 계속된 것으로 보아 여전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체가 비싸 이를 대체한 족두리를 허락하였지만, 족두리 또한 보석으로 장식하여 값이 매우 비싸서 다리보다 폐단이 크다는 기록이 있다. 1788년(정조 12)에는 가체를 금지하는 법인 『가체신금사 목(加髢申禁事目)』이 제정되었으며359)『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10월 신묘. 한국은행 소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반부는 한문을 쓰고, 후반부에는 다시 한글 번역 및 별도의 한글 전교를 실었다.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에게 해당되는 법으로 여자들이 당시 한문보다는 한글에 더 익숙한 것을 감안하여 내린 조치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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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신금사목』
『가체신금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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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髢髻)를 대신하는 쪽머리는 순조 중엽에 가서야 이루어진 듯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국조 중엽 정조 신해(1791) 이전까지는 대체(大髢)가 있어 이것을 가발이라고 하였으며, 자기 머리와 합쳐 땋지 않고 긴 다리를 땋아 머리를 한 번 두를 만큼 만들어 넣고 비녀를 꽂았다. 정조 신해 이후 가발을 금하고 북계(北髻) 속명 낭자(娘子)라고 하는 것을 하였는데, 이것은 머리를 땋아 뇌후(腦後)에 둥글게 서린 다음 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쓰게 한 것이다. 순조 중엽 후로 전국의 부녀가 다리로 머리를 얹는 법을 없애고 자기 두발로 뇌후에 쪽을 찐 다음 작은 비녀를 꽂았는바 이것이 그대로 풍속이 되었다. 경인(1830)에 이것을 금하고 다시 머리를 얹게 하는 일이 있었으나 실시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360)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동국부녀수식변증설. 고 실려 있다. 머리가 점차 간 략해지는 모습은 개항기 때의 사진이나 김준근(金俊根)의 『기산풍속화첩(箕山風俗畵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체가 금지되고 쪽머리로 변하면서 머리를 장식하는 장신구도 변화하였다. 특히, 쪽을 고정하는 비녀가 매우 다양해지고 발전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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