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6장 멋스러움과 단아함을 위한 치장
  • 1. 머리치장
  • 여인의 외출 차림새, 너울
송미경

너울은 조선시대 왕실의 여인과 귀부인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는 데 착용하던 모자의 테두리 위에 얇게 비치는 비단을 씌운 여성용 쓰개이다. 너울에는 장식품인 너울드림과 장식 매듭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너울’이라는 명칭은 얇은 비단이 너울거리는 모습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명칭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신분에 따라 색상이 달라 왕비나 세자비는 자주색, 상궁은 검정색을 사용하였다. 너울을 착용한 모습은 궁중의 행사를 기록한 의궤에서 조선 후기까지 자주 볼 수 있는데, 영왕가례반차도(英王嘉禮班次圖)373)고종과 엄비 사이에서 태어난 영왕(1858∼1926)은 2005년에 사망한 이구 씨의 아버지이다. 영왕이 영왕비와 가례(嘉禮)를 올릴 때 행사를 그린 그림을 영왕가례반차도(英王嘉禮班次圖)라고 한다.에서 상궁이 너울을 착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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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 너울
여흥 민씨 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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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로는 두 점이 전해지는데 모두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너울의 모자 없이 덮개에 해당되는 옷감만 남아 있다. 한 점은 경기도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너울로, 정부인(貞夫人) 여흥 민씨(驪興閔氏, 1586∼1656)의 것이다. 여흥 민씨는 정광경(鄭廣敬, 1586∼1644)의 부인으로 그녀의 무덤에서 외출복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장옷 12벌이 나왔다. 이것으로 보아 여흥 민씨의 생존 시기에는 여성들의 외출이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품인 여흥 민씨 너울의 정확한 색상은 알 수 없지만 자줏빛이 도는 청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이 얇은 비단은 사경교라(四經絞羅)로 네 올의 실이 교차되어 작은 구멍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가졌다. 너울의 안쪽에는 모자를 얹힐 수 있는 나비 1㎝ 정도의 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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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왕가례반차도
영왕가례반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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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재현품
너울 재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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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 점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으로, 모자 미라 상태로 발견되어 유명해진 파평 윤씨의 너울이다. 파평 윤씨는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집안의 여인으로, 함께 출토된 바지의 끈에 병인년(1566)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 확실한 연대가 있다. 모양은 여흥 민씨 너울과 흡사하나, 파평 윤 씨의 너울에는 너울드림과 장식 매듭인 유소가 함께 출토되었다.

얇은 비단으로 만든 너울을 착용해 보면, 빛의 투과로 인해 안쪽에서는 바깥의 사물을 잘 볼 수 있지만, 바깥에서는 너울을 쓴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이것은 선글라스를 끼거나 유리에 선팅을 한 자동차를 탔을 때와 같은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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