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가리마(加里磨)를 쓰는 여인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가리마는 편지 봉투(書套)처럼 생겨서 머리를 덮는다고 되어 있다. 궁중에 소속되어 각 방의 물 긷기, 불 때기 등의 잡일을 맡아 하던 신분이 낮은 무수리나, 내의원(內醫院)과 혜민서(惠民署) 의녀(醫女)와,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에 있는 침선비(針線婢)는 지방에서 차출한 기생들로 잔치가 있을 때 노래와 춤을 추었다. 무수리, 침선비, 기생들은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에 가리마를 썼다. 내의원의 의녀는 검정색 비단으로 가리마를 만들고, 그 외 사람들은 거친 검정색 베로 만들었다. 방언으로는 멱(羃)이라고 한다.374)유득공, 『경도잡지』 권2, 풍속(風俗), 성기(聲伎). 가리마는 요즈음 대학 졸업식 때 쓰는 사각모를 길게 하여 납작하게 접어 만든 형태이다.
이와 같은 가리마는 풍속화에 주로 기생들이 쓰고 있어 신분이 낮은 사람의 모자로 인식되었으나, 17세기의 편지 글에 보면 반가(班家) 여성들 의 성장용(盛裝用) 머리쓰개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유명한 곽재우의 조카인 곽주(郭澍)는 부인 진주 하씨(晋州河氏, 1580∼1646 추정)에게 “아주버님이 오늘 가실 길에 우리에게 다녀가려 하시니, 진지도 옳게 잘 차리려니와 다담상을 가장 좋게 차리게 하소. 자네를 보려고 가시니, 머리를 꾸미고 가리마를 쓰도록 하소.”라고 당부하고 있다.375)이은주, 「17세기 전기 현풍 곽씨 집안의 의생활에 대한 소고」, 『복식』 51권 8호, 2001, 33∼34쪽. 18세기 기생들이 가리마를 쓴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조영석(趙英祏, 1686∼1761)이 그린 절구질하는 여인이 쓴 머리쓰개가 혹 곽주의 부인 진주 하씨가 살았던 시기의 가리마는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