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1. 두루 막힌 두루마기
  • 1400년 동안 입어 온 중국식 관복을 벗고
최은수

조선시대 500년의 복식 역사를 더듬어 볼 때, 특히 남자 관복은 매우 복잡했다. 이것은 봉건 국가에 있어서 상하·존비·귀천의 등위를 구별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됨으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일대 개혁을 단행하여 복식에서도 서구화와 간소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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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준 대례복
박기준 대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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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복을 입은 민영환
대례복을 입은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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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에 의해서 복식의 변화가 일어나 갑신정변 때 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 두루마기(周衣)를 입었고 검정색 주의로 통일되었다. 관리의 복식도 공복·상복·시복이 흑단령 하나로 통일되었으며, 소매의 넓이로 대례복과 소례복을 구별하였고, 공복의 복두가 없어지고 사모만 남았다. 무관의 복식은 문관보다 먼저 양복으로 바뀌어 1895년 군인들의 복장이 양복으로 바뀌었고, 을미개혁 때 단발령과 함께 외국의 의복 제 도를 채용해도 무방하다 함으로써 제도적으로 양복이 공인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할 때 임금의 제복인 면복이 십이류면 십이장복으로 바뀌었고, 1899년에는 외교관의 복식을 양복으로 하였다. 1900년에는 백관복으로 대례·소례복인 단령이 양복으로 바뀌어 대례복으로는 영국의 궁중 예복을 모방했고, 소례복으로는 연미복을 착용했으며, 개화기 이후 연미복을 혼례 때 입게 되었다. 수구 세력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관복이 양복화됨에 따라 상류층에서 양복을 입기 시작하였으나 평상복으로서의 양복은 민중의 의식과는 동떨어져 있어서 일반인은 대부분 한복을 착용하였다.394)김진식, 『한국 양복 100년사』, 미리내, 1990,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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