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1. 두루 막힌 두루마기
  • 만민 평등의 옷, 두루마기
최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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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갓과 두루마기
좁은 갓과 두루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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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의제 개혁 이후 두루마기는 삼국시대처럼 남녀와 귀천이 없이 착용하게 되었다. 갑자기 시행한 의제 개혁은 백성에게 납득되지 않아 큰 반대에 부딪혔으나 10년 후에는 모두 두루마기를 입었고 진궁 통상 예복(進宮通常禮服, 흑색 주의와 답호)으로까지 승격하였다. 1895년 3월에는 내부 고시를 통해 왕과 백성이 동일한 의제(衣制)인 흑색, 갈색 등 색깔 있는 두루 마기를 착용하게 한 것은 의제상으로라도 구별이 없고 같음이요, 또한 편의를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는 고종 및 개화파의 평등 사상이 복식에 표현된 것이다. 『독립신문』 1898년(광무 2) 12월 10일자에 찬양회 부인 회원들이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기록으로 보아 여자들도 방한복으로 다시 두루마기를 입게 되었다. 이는 남녀 평등 사상이 표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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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기
두루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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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널리 보급된 남성용 외출복인 두루마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외출할 때는 반드시 겉옷으로 포(袍)를 입었는데, 의제 개혁으로 두루마기가 생기기 전에는 매우 다양한 포를 입었다.

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한 방한복의 역할과 의례적인 용도를 겸하였다. 외출할 때 포를 입는 것은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이지만,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반면, 제사를 지낼 때 포를 입는 것은 예의를 갖추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평민들은 포를 입거나 쓰지 못하였다. 너풀대는 도포를 입고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을 보면 평민과 천민은 길을 비켜 주거나 길가에 엎드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도포는 특수 신분을 나타내는 증명서와 같았다.

그러나 의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포를 한 가지로 통일하여 두루마기라고 하였다. 헐렁한 소매를 짧게 하고 아래 길이를 짧고 좁게 했으며 허리에 매는 띠 대신 고름이나 단추를 달았다. 색깔도 다양했으며 누구나 입을 수 있도록 허용되어 ‘만민 평등의 옷’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두루마기는 남녀 모두에게 유행하였다. 남자는 대체로 검은 물을 들여 단추를 단 개량 두루마기를 입었고, 무명이나 명주뿐만 아니라 옥양목이나 양복감으로 해 입기도 하였다. 여성은 여러 가지 색깔을 들인 비단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어린 이도 색동옷을 모방하여 만들어 입었다. 기생에게는 비단 두루마기가 필수복이었다. 백색 도포는 제사 때만 입을 정도로 골방으로 밀려났다. 이 무렵 유행한 개량 두루마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의복의 역사에서 두루마기는 귀천을 가리지 않는 옷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남자의 일상복에서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조끼의 착용이었다. 예전에 양반이나 벼슬이 있는 사람은 평상복으로 집 안에서는 마고자를 입었고, 서민은 거의 저고리 차림으로 다녔다. 본래 물건을 담는 주머니는 저고리 안쪽에 달았는데, 개화기에는 양복 재킷 호주머니를 본떠서 양쪽에 주머니를 고정해 달고 왼쪽 상단에 작은 주머니를 단 개화 조끼가 등장하였다. 조끼는 권장하지 않았는데도 간편하여 금방 보급되었다. 중간 겉옷이어서 두루마기 대신 외출복으로도 입은 조끼는 남자의 경우 거의 필수복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형태의 조끼를 착용하였는데, 겨울에는 토끼털이나 동물의 털을 댄 것을 입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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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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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자
마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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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자도 새로이 유행하였다. 임오군란(1882) 당시 흥선 대원군이 청나라에 잡혀가 있을 때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만주식 마고자를 입었다. 마고자는 저고리와 같은 크기와 길이이나 품이 좀 더 넉넉하였다. 옷고름 대신 호박이나 금동을 단추처럼 달았으며 주로 외출할 때 입었기에 털이나 솜을 두툼하게 넣었다. 흥선 대원군이 마고자 입은 모습을 보고 여느 사람들도 추울 때 집 안에서 입거나 외출할 때 입었다.

남자의 평상복인 바지저고리는 별다른 변화 없이 예전처럼 바지저고리와 속적삼, 토시, 대님을 사용하였다. 다만, 1920년대에 서양식 셔츠가 유입되자 속적삼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또 아래 속옷은 거의 입지 않았는데 셔츠와 함께 팬티가 유입되었다. 농민들은 서양 물품인 셔츠와 팬티의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다.395)이이화, 『빼앗긴 들에 부는 근대화 바람』, 한길사, 2004, 181∼183쪽. 편한 서양식 속옷이 등장하자 우리의 전통 속옷은 차츰 실용 가치를 잃고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장갑이 들어오면서 방한구였던 토시(吐手)가 사라졌으며, 교통수단이 점차 발달하면서 다리에 차는 행전도 자연히 소멸하였다. 양말이 등장하자 버선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추세에 반발하여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는 토산품 애용 및 민족 기업 육성으로 이어졌다. 1923년 조선 물산 장려회 창립 취지서를 보면, 의복의 경우 남자는 두루마기를, 여자는 치마를 음력 계해(1923) 정월 1일로부터 조선인 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하여 착용하라는 조항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의복의 토산품 애용이 물산 장려 운동의 주된 내용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YMCA에서는 계몽 사업과 생활 개선에 주력하였는데, ‘흰옷 염색하기’가 주요 활동 중의 하나였다. 『조선일보』는 “조선 사람아! 새로 살자.”는 사고(社告)를 1929년 3월 22일자로 싣고 생활 개선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그 중 “생활부터 달라야 힘을 기를 수 있다.”는 다섯 개 주요 과제의 하나로 ‘색의 단발(色衣斷髮)’을 내걸었다. 이 운동은 사회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색의 장려는 애국 계몽 차원뿐만 아니라 일제의 일선 행정 기관에서도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전라남도에서 나온 색의 권장 전단을 보면, “생활 개선은 우선 물든 옷 입는 것으로부터”라는 표어가 있다. 흰옷은 더러워지기 쉽고 자주 빨래를 해야 하므로 비경제적이니 도민은 모두 물들인 옷을 입자는 것, 흰옷을 염색하는 법 등을 내용으 로 하고 있다. 이때의 흰옷은 신식 생활로 가기 위해 반드시 개선해야 하는 구시대의 유산이며, 여성 노동력의 동원을 위해 타파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색옷 입기 운동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의 흰옷 입는 전통이 매우 뿌리 깊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전 시기에 걸쳐 국가에 의해 백의 금제 조치가 많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이 소색(素色)을 착용하는 습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과도 맥이 통한다고 볼 수 있다. 항상 입었던 흰옷 그 자체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제에 의하여 끊임없이 착용을 제한받는 과정에서 일종의 저항적인 요소를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흰옷을 입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의 민족성과 단결심을 이끌어 내는 힘이었던 것이다.396)구문회, 「우리 옷의 발자취를 통해 본 사회상」, 『생활 속에 담긴 우리 옷의 발자취』, 국립 민속 박물관, 2003, 8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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