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2. 이발소와 미용실
  • 파마 미인 오엽주
최은수

단발은 근대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어서 남녀 모두에게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남자의 단발은 을미개혁(1895) 이후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나, 여성의 머리 변화는 단발보다도 ‘히사시가미’400)ひさし-がみ(庇髮)는 앞머리를 모자 차양처럼 내밀게 한 머리로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다이쇼(大正) 시대에 걸쳐 유행한 머리형으로 일본 여배우 가와카미(川上貞奴)가 했던 것이 신여성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연예인을 모방하는 풍조에 따라 한국의 유학생들도 유행을 따랐다.라는 머리 스타일이 먼저 유행하게 되었다. 앞머리를 불룩하게 빗어 올리는 형태로 동경에서 유학하고 온 윤심덕(尹心悳)이 우리나라 공연 중에 최초로 선보인 것이라고 하는데 1910년대에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였 다. ‘히사시’ 이후 여학생의 머리는 앞에 옆가리마를 타서 갈라 빗은 다음 뒤통수 한가운데에 넓적하게 틀어 붙이는 형태의 트레머리가 유행하였다. 넓적하고 클수록 보기 좋다고 하여 속에다 심(다리의 일종)을 넣고 겉에만 머리를 입혀서 크게 틀었는데, 이 스타일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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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사시가미
히사시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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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단발을 둘러싸고 수차례 토론이 벌어졌지만, 여성에게 단발은 그 자체가 패션 행동이고 사회적으로도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단발을 한 여인을 미행하여 그 정체를 밝히는 잡지 기사가 흥밋거리로 등장할 정도였다.

오른편 엇던 큰집 행랑 가튼 데로서 엇던 신식 여자 두 분이 손목을 마조 잡고 나서것다. 눈치 빠른 C는 언제 보앗든지 내 녑구리를 뚜러지게 꾹 찌르며 ‘엑크 단발 미인!’ 하고 거름을 멈추면서 나더러 보라는 듯 은근히 숙을 한다. …… 우리 뒤에 오는 사람들도 언제 보앗든지 발서 ‘단발 양! 단발 미인’ 하고 서로 주고밧고 떠든다. 압흐로 오든 사람들도 ‘꽁지 빠진 병아리 갓다’느니 ‘송락 쓴 여승 갓다’느니 별별 해괴한 수작이 다 들니인다.401)복면자, 「경성 명물녀 단발낭 미행기-아모리 숨기랴도 나터나는 이면」, 『별건곤(別乾坤)』 2, 1926년 12월, 69∼70쪽 ; 김주리,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 살림출판사, 2005, 43쪽 재인용.

단발 여인들은 단지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만인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양장 미인’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듯이 단발만으로 ‘미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여성의 단발 문제를 바라보는 남성 혹은 일반인의 시선에는 이미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여성 단발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찬반론을 대표하는 의견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가편(可便) 김활란(金活蘭): 제일에 단발은 위생상으로 보와 좃슴니다. 우리 여자들은 신식이나 구식을 물론하고 모다 머리를 쪽지는 까닭에 그 쪽이 뇌(腦)를 눌러서 정신에 좃치 못한 영향을 줌은 물론이고 머리에 항상 때가 끼는 까닭에 의복이 드럽기 쉽고 냄새가 또한 좃치 못하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아에까지 해롭게 되는 일이 만슴니다. 제이는 시간상으로 보와 퍽 경제가 됨니다. 제삼으로 단발은 미적 방면으로 보와서도 좃슴니다. 제사는 단발은 세계 대세에 순응하는 것임니다. 제오 단발은 여성 해방에 유일한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부편(否便) 정종명(鄭鍾鳴): 단발하는 여자들의 말을 드르면 첫재의 이유는 해방 운동을 하자면 먼저 형식부터 일신하게 개혁을 하여야 될 터이닛가 무엇보다도 먼저 단발을 하여야 된다고 함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지 결코 조선 전체의 사정을 모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둘재에 단발은 시간이 퍽 경제가 된다고 함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발이나 단발이나 자기가 하기에 달이엿지 장발을 한다고 곡 시간이 랑비되고 단발한다고 시간이 경제되는 것은 안이올시다.402)「남녀 토론-여자 단발이 가(可)한가 부(否)한가」, 『별건곤』 1929년 1월호 ; 김주리, 앞의 책, 44∼45쪽 재인용.

『별건곤』이 주최한 여자 단발에 대한 토론에서 단발이 옳다고 주장한 사람은 김활란으로, 스스로가 단발 여성임을 밝히며 단발이 위생적·실용적·미적·경제적이고 세계 추세이기 때문에 옳다고 정리하고 있다. 단발을 부정하는 측은 단발 자체의 부정이라기보다 단발을 한 사람들에 대한 부정이 크다. 즉, 단발은 허영에 찬 신여성이 내세우는 외화의 한 면모로 강석자(姜錫子), 이월화(李月華), 김명순(金明淳), 최성해(崔星海) 등 기생이나 여배우 출신 단발 미인들의 부도덕이 보고되면서 절개의 징표로써의 단발은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성의 단발머리는 미국의 무성 영화가 퍼뜨린 것으로 귀가 보일 정도로 짧게 자르고 머리 가운데 가르마를 내 양편으로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호리존탈, 씽글, 터취컷, 보이쉬 빱 등 네 가지 종류가 있었다.403)김희정, 「별건곤(別乾坤)을 중심으로 본 신여성의 복장에 관한 연구」, 『복식 문화 연구』, 2004, 215쪽. 이렇듯 단발은 정절을 표현하거나 구제도에 대항하고 자신의 의지를 맹세하려는 의도 외에도 실질적인 편리함으로 그 필요성이 점점 증가하였다.

새로운 미의 도입이라는 관점에서 1937년부터는 ‘파마’가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파마를 맨 처음 한 여인은 누구일까? 파마가 첫선을 보인 것은 1937년이었는데 당시에는 파마를 전기로 머리카락을 지진다고 해서 전발(電髮)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글로 쓸 때의 점잖은 표현이고, 일상생활에서는 알아듣기 쉽게 ‘지지고 볶는다’고 하였다. 맨 처음 머리를 지지고 볶은 여성은 과연 누구일까? 이월화라는 기록도 있고, 김명순이라는 자료도 있다. 또 문마리아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정애식이라는 기록도 있고, 최예순(崔禮順)·윤성덕(尹聖德)·서은숙(徐恩淑)이라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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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행 깎은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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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녀들 모두 당시의 이른바 신여성으로 사회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월화는 영화배우였고, 김명순은 소설가였으며, 문마리아·정애식·최예순·윤성덕·서은숙은 모두 이화 학당 출신이었다.

또한, 기생들 역시 최첨단 헤어스타일인 지지고 볶는 머리 모양 대열에서 빠질 리 없었다. 강향란이 대표적인 여성이었다. 파마의 원조가 그녀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첨단 유행은 일류 기생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멋에 대해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옆 가르마를 타서 양 옆머리를 물결치듯 웨이브 넣는 것은 멋에 대해 과감성을 지닌 이들이 아니고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920년대 ‘파마’가 도입되기 전에는 단발머리가 크게 유행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파마는 바로 단발머리를 전기열로 지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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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엽주 미용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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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마가 등장한 1937년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오엽주(吳葉舟)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1933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 안에 미용실이라는 생소한 업소를 개업하고 그곳에서 파마를 해주었다. 그녀가 최초로 파마를 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진으로 남아 있는 1937년의 모습, 그리고 미용실을 개업하기 전후의 행적으로 볼 때 그녀가 파마 머리를 선보인 최초의 여성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오엽주는 1904년 황해도 사리원 태생으로 원래는 영화배우 지망생이었으나 일본에서 미용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진로를 바꾸었다고 한다. 그녀가 차린 화신 미용부는 파마, 세팅, 매니큐어, 신부 화장 등을 하였는데, 가스 난방에 의한 더운물이 항상 나오고 드라이어가 있는 최신 시설로 특수층에 속하는 여성들이 이곳을 애용하였다. 이 미용실은 일본 화장품 회사가 장식을 도맡아 삼면경 달린 경대며 긴 의자, 소파 등으로 호화롭게 꾸며 주는 대신 수입은 모두 일본 화장품 회사가 차지하였다.

당시 서른 살을 갓 넘어 우아한 여성스러움이 한창 돋보이던 그녀는 1933년에 이미 쌍꺼풀 수술을 했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정교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한국인으로서 미용 성형 수술을 받은 첫 사례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색깔 있는 안경을 착용했으며, 코르셋으로 꽉 졸라맨 몸매에 굽 높은 구두와 정동 러시아 공사관 앞의 양장점에서 지어 입은 슈트부터 드레스까지를 때맞춰 차려입었던 장안의 유명인이었다.404)김유경, 앞의 책, 235쪽.

파마 값은 5원 정도였는데, 이는 금가락지를 사서 낄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그래도 고객은 계속 증가했으며, 특히 부유층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그녀들에게 파마는 가슴이 떨릴 만큼 경이로운 경험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다. 파마를 하고 나면 대부분 미용실 밖을 몇 번씩 두리번거리곤 하였다. 머리를 지지고 볶은 다음 선뜻 미용실 밖으로 나서는 여성은 강심장 중에서도 강심장이었다. 해가 넘어가 어둑해져서야 미용실 밖으로 나가는 여인들도 있었다.405)김은신, 앞의 책, 281∼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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