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3. 모던 보이, 모던 걸
  • 황토마루에 생긴 최초의 양화점
최은수

양장 및 양복의 역사와 더불어 필수적인 것이 양화이다. 멋쟁이 신사와 신여성들은 양복에 걸맞게 양화를 신었고, 그즈음 구두 광고도 매우 치열하였다. 당시 신여성들에게 구두는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신분 과시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구두 한 켤레 값이 벼 두 섬과 맞먹을 정도로 비싼 사치품이었다. 부유한 양반집에서 신던 가죽신이 양화점의 구두로 대체될 때 가죽신 이 표상하던 신분의 질서는 정통성을 상실하였다. 이제는 양복에 반짝이는 구두가 새로운 신분의 질서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맨 처음 양화점이 생긴 곳은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였던 황토마루였고, 이규익이라는 사람이 주인으로 알려져 있다. 때는 1898년경이었다고 한다. 1910년 『매일신보』가 창간된 직후의 광고를 보면 구두는 혜(鞋)와 화(靴)로 혼용되어 표기되어 있다. 즉, 각종 양혜, 양화점, 또는 단화, 양화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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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풍 양화점
세풍 양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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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서양의 신발인 구두가 아직 그 명칭조차 정착되지 않았을 정도로 거의 보급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혜’는 목이 없는 신발로 우리나라 전통 신을 이르는 말이다. 처음으로 양화점이 생겼을 때는 양화보다 양혜라는 명칭이 더 많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황토마루에 처음으로 양화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 상점을 인수해서 수십 년을 경영해 오던 박덕유(朴德裕)가 1936년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힘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구두 한 켤레 맞추어 신는 값이 9원이었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가격과 맞먹는 값이었다. 박덕유의 양화점은 지금의 종로 2가에서 인사동 사이에 있었다. 황토마루의 양화점은 영업 부진으로 폐업하였다. 당시 구두를 신었던 사람은 왕족이나 외교관들로 극히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덕유도 인수 후 5∼6년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던 중 태평로에 피혁 상회가 들어서면서부터 양화점이 하나 둘 증가했고 구두 보급도 활발해졌다. 당시 구두는 한결같이 목이 길고 끈으로 매는 이른바 전통화였다. 가죽은 쇠가죽만을 사용하였고 수입처에 따라 질이 다양하였다. 그래서 어떤 가죽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구두 값도 달랐다. 그 당시만 해도 구두를 맞추러 양화점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전화로 연락하면 점원이 직접 찾아가 치수를 재 온 뒤 제작하였다. 지방에 있는 사람도 종이에 발 모양을 그린 다음 치수를 재서 우편으로 보내 주면 제작해 우송해 주었다. 신문 광고란에 그 요령이 실렸는데, 재야 할 부분을 ‘족지전배(足之前背)’라 표기하였다. 구두 값 역시 우편환으로 보내 주면 되었다.417)김은신, 앞의 책, 249∼252쪽.

곧이어 국산품 구두가 등장하였다. 1930년대 당시 구두 한 켤레 값은 8∼9원이었다. 쌀 한 가마니와 거의 맞먹는 가격이었으며 월급쟁이는 거의 한 달 봉급을 털어야 살 수 있었다. 폴란드에서 생산된 가죽으로 만든 수입 구두는 배의 값으로 팔렸다. 그래서 구두를 아끼려고 뒤축에 징을 박거나 비 오는 날에는 외출을 삼갔다. 제화공은 하루에 한두 켤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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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점 광고지
양화점 광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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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공장과 제화점이 많은 일본의 오사카, 고베에서는 해마다 제화 기능 경진 대회가 열렸다. 조선 제화공도 참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1930년대 말 경성의 오사카 양화점에 근무하는 제화공이 최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남녀용 모두 검은색 평구두가 주종이었지만 유행에 따라 변형이 나타났다. 1930년대 모던 보이는 백색 구두를 뽐내고 다녔으며 모던 걸은 하이힐을 신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구두는 고무신과는 달리 자산가와 지주, 관리의 신발이었다.

가지각색의 치마 빗에 여학생들은 붉은 줄, 하얀 줄까지 달고 가지각색 머리를 틀고 하얀 분과 붉은 분을 얼굴에 바르고 가지각색 향수 냄새를 풍기며 천길 만길 되는 굽 높은 구두에 또는 사나이 구두 이상으로 펑퍼짐한 구두에 또 격에 맞지 않는 얻어 입은 것 같은 양장 미인들, 또 왕창 다르게 부인네들은 햇볕에 거울처럼 번쩍이는 기름 바른 반지르르한 머리에 누런 비녀, 흰 비녀, 검은 비녀를 꽂고 또 아래에는 흰 고무신, 깜장 고무신, 누런 고무신을 신고 거기다가 빨강 우산, 파랑 우산, 알락달락한 우산을 받고 이 천태만상의 여인 풍경에 가뜩이나 얼빠진 조선 청년 남자를 정신 못 차리게 한다.418)방춘해, 「복식에 가지가지」, 『별건곤』 1930년 10월호.

여성의 구두 모양과 고무신의 색깔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 먼저 신발 모양과 색깔의 다양함을 추구하고 또 유행시켰던 것 같다. 여학생도 이런 풍조에 따라 뒤로 끈을 얽는 목이 긴 구두를 신거나 굽이 낮은 ‘펌프스 슈즈’를 신거나 구두의 앞부리에 꽃무늬를 놓거나 리본을 달기도 하였다. 여학교에서는 신발 사치를 막으려고 검정 운동화를 교화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도시 빈민이나 농촌 서민은 구두를 살 엄두를 내지 못했고 고무신마저 살 수 없었다. 대다수는 여전히 짚신과 나막신을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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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막신 장수
나막신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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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새로 개발된 여러 가지 종류의 짚신이 등장하였다. 여자용 꽃신은 22총으로 섬세해졌고, 짚신에 질긴 한지를 섞어 감기도 하였다. 짚신의 재료로 넣은 한지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오랜 시간 걸을 때는 족병을 예방하는 등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도보로 다니는 사람에게는 땀이 배는 구두나 고무신보다 짚신이 더 효용성이 높았다.

또 나막신은 진흙 길을 다니기에 편리하였다. 당시에는 진흙 길이 많아 나막신을 쉽게 버리지 못하였다. 나막신 밑바닥에는 징을 박아 마모를 막았다. 일본 사람은 진고개와 명동 일대에 살면서 게다를 신고 딱딱 소리를 내며 다녔다. 게다는 비가 올 때 길바닥의 빗물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본 농부나 일꾼들은 옷감으로 만든 지까다비와 짚으로 만든 조리를 즐겨 신었다. 이것은 남방형 신발로 엄지발가락에 끈을 꿴 모양이다. 신발만 보고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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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 풍자화
게다 풍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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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는 만들기도 쉽고 주변에 재료가 많아 조선 어린이들도 신었다. 도시에 사는 조선 사람은 게다를 신고 다니기도 하였다. 『별건곤』 1933년 6월호에 기모노를 입은 조선 남자가 태극선을 들고 고무신을 신고 있으며, 조선 여인이 한복 차림에 손에 무와 두부를 들고 게다를 신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나서 ‘꼴’이라고 쓴 풍자만화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는 버선에 구두를 신거나 갓 쓰고 자전거를 타듯 새로운 문화와 구래의 문화가 급격히 상충하는 현실에서 별로 이상한 풍경은 아니었다.419)이이화, 앞의 책, 214∼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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