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3. 모던 보이, 모던 걸
  • 최초의 안경점 ‘명안당’, 부의 상징 손목시계
최은수

한국인이 경영하는 안경 전문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0년 4월 2일 『동아일보』 창간 축하 광고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날 종로에 있는 동양당 시계포와 명안당(明眼堂)이 광고를 냈는데, 모두 안경 전문점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안경은 일종의 액세서리이자, 이른바 개화의 상징물로써 권위를 나타냈다. 신문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으레 양복에 안경을 착용하고 다녀 안경을 쓰면 지식층으로 보이고, 인품도 달라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안경은 ‘공부하는 여성’의 면모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신구여서 신여성들이 착용했는데 김마리아, 황에스더, 김일엽 등은 당시에 드물게 안경을 쓴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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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엽 캐리커처
김일엽 캐리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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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1920년대 접어들면서 과학적인 방법에 의한 전문 안경점이 등장하였다. 이는 세브란스에서 배운 사람, 일본의 기술자를 통해 배운 사람, 혹은 독자적으로 기술을 터득한 사람들이 속속 개업했음을 의미한다. 세브란스 병원의 창립자 에이비슨(Oliver. R. Avison)은 처음으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안경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초기에는 안경점에서 시계와 안경을 함께 취급하였다.

동양당 시계포와 명안당도 마찬가지였다. 업주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명안당은 그 후 계속 활발하게 광고하여 초창기 안경점의 실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명안당은 주로 미국제 금테 안경을 취급하였는데, 가격은 3원 50전에서 7원까지 다양하였다. 이때는 금 한 돈에 5원 50전 정도 할 때였다. 또 5년에서 25년까지 보증해 주고, 그동안에 안경테가 변색되면 100원을 주겠다고 선전하였다. 한국인 경영 안경점은 주로 미제와 독일제를 가지고 일제와 경쟁하였다.427)김은신, 앞의 책, 109∼111쪽.

당시 여학생은 빈자리를 두고도 전차에 앉기를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곱게 다려 입은 스커트가 구겨질 염려도 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흰 팔에 찬 십팔금 손목시계 때문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20원짜리 금시계를 소매 속에 감추어 두기 싫어서 팔을 뻗어 고리를 잡을 만큼 금시계의 유무는 여학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다.

모자는 여성의 이용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 없이 남성용과 동일하게 제작되었으나 서울에서 이홍래(李鴻來)가 여모(女帽) 제조 회사의 설립을 인가받으면서 점차 활성화되었다.428)고부자, 앞의 책, 85쪽.

모자의 형태는 박에스더가 썼던 카노티에와 고순영이나 윤고라가 썼던 캐플린, 단발머리에 어울리는 클로슈 등이 있으며 모양도 티롤리안본형, 제라이본형 등 형태의 구분이 생길 만큼 다양해졌다.

1920년 『동아일보』에 실린 모자 광고에는 남자들의 파나마모자를 비롯하여 꽃이나 리본 장식이 있고 모자의 브림(brim)이 아래로 향한 머시룸 해트나 스트로해트 형태가 많이 보인다. 모자의 가격은 2원 50전부터 29원까지 다양하였다.429)김희정, 앞의 책,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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