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09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 제7장 우리 옷을 밀어낸 양장과 양복
  • 3. 모던 보이, 모던 걸
  • 박가분과 동동 구리무
최은수

화장이란 신체의 아름다운 부분을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하거나 위장하는 수단이다. 화장이란 말은 개화기 이후부터 사용된 외래어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백분, 연지, 머릿기름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유교 문화에서는 여성의 화장을 억제했으나, 시집가는 처녀와 시집간 새댁에게는 화려한 화장이 허용되었다.

개항 이후 우리나라 화장 문화도 새로운 변화와 전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외국에서 수입한 화장품이 널리 보급된 것이다. 이 화장품을 ‘박래품(舶來品, 히쿠라이)’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명성황후와 궁녀들이 즐겨 사용했으며 이어서 고관 부인들이 썼다. 그러나 화장품의 유행을 선도한 것은 러시아 직업 여성과 일본 기생이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기생 등 직업 여성뿐만 아니라 신여성과 가정 주부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백화점에서는 프랑스에서 수입한 코티 분과 코티 향수 등 서양제 화장품과 포마드, 크림 등 일본제 화장품을 팔았다.

외국 화장품에 자극을 받아 오리지널 브랜드를 붙인 국산 화장품도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박가분은 면포점을 운영하던 박승직(朴承稷)의 아내인 정정숙이 내조하기 위해 집에서 수공으로 제조해 면포 상품 고객에게 사은품으로 주었던 것이다. 박가분이 인기를 끌자 장분 제조 기술자를 고용해 본격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했으며, 1918년 8월에 특허국으로부터 상표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박가분은 조선 관허 1호 화장품이 되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판매 확대를 위해 화장품으로는 최초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지면 광고를 실었다. 박가분이 광고를 시작하자 당시 경쟁 제품이었던 서가분, 장가분, 그리고 일본 분인 구라부 백분 등도 광고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분들은 광고를 통해 한결같이 납이 들어 있 지 않은 백분임을 강조하였다. 이는 박가분이 연분이어서 납 중독을 일으키는 약점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었다.

확대보기
박가분
박가분
팝업창 닫기

박가분이 큰 인기를 얻은 것은 얼굴에 매끄럽게 잘 발려서 촉촉하게 흡수되며 향을 첨가하여 외제와 같은 향을 냈으나 외제보다 가격이 훨씬 쌌기 때문이었다. 한 달 평균 1만 개나 팔렸으며 박가분 하나 사 주지 못하는 남자는 무능한 남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분이었던 박가분의 부작용이 마침내 표면화되어 전국적인 고소 사태로까지 이어져 박가분의 납 중독 사건은 1937년 박승직이 폐업 신고를 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 여파로 국산 분을 외면하기 시작하여 다른 분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분 이외에도 포마드, 로션 등도 생산하여 판매되었으며, 특히 ‘동동 구리무’라는 크림이 크게 유행하였다. 크림은 우리나라 전통 화장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화장품으로 겨울철에 손등이나 얼굴이 트는 것을 방지해 주었다. 동동 구리무는 당시 풍악을 울리면서 크림을 팔았던 러시아 행상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북을 두 번 친 후 크림의 일본식 발음인 ‘구리무’를 외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늘날의 리필제처럼 필요한 만큼 용기에 덜어 살 수 있었던 동동 구리무는 일제강점기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화장품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행상도 리어카나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화장품을 팔았다. 이 무렵 분과 크림은 대중과 밀착되어 필수 화장품이 되었다.

화장하는 법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기생들의 화장법은 얼굴이 창백해 보이리만큼 하얗게 분칠한 얼굴에 가늘게 그린 눈썹 그리고 뺨과 입술에 붉은 연지를 발랐다. 이 화장을 ‘분분자’와 ‘눈썹 먹대자’를 써서 분대 화장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일반 가정집 여인들은 얼굴에 분만 살짝 발랐는데 화장이 엷다고 해서 박화장이라 불렀다.

당시 언론과 지식인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의 요란한 유행을 지탄하면서 서양이나 일본제 화장품과 향수를 바르고 빨간 립스틱을 칠하는 풍조를 나무랐다. 입술이 지나치게 붉으면 쥐 잡아 먹었냐고 비웃었으며, 분을 덕지덕지 바르면 화냥년이라고 나무랐다.430)부산 근대 역사관, 앞의 책, 116∼121쪽.

또한,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팥, 녹두, 쌀겨, 창포의 가루를 비누 대용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쓰기는 어려웠고, 더구나 세수용 비누와 목욕용 비누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유한 집에서는 난초 삶은 물로 비린내를 없애거나 향을 내기도 했고, 인삼을 물에 달여 피부를 매끄럽게 하였다. 껍질을 벗긴 마늘에 초를 섞은 물로 여드름을 치료하기도 하였다. 세제라기보다는 미용 효과를 얻기 위한 것들이었다. 화장품 대접을 받던 비누를 보건 용품이라고 규정하였다. 비누의 용도를 몰라 물어뜯어 보는 사람도 많았다. ‘호시미 비누(ほし美䶨, 당시 유행하던 비누 상표)’가 비누를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잣대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431)김태수, 앞의 책, 218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