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1장 땅에서 나는 우리 음식 재료
  • 1. 가장 중요한 음식 재료, 곡물
  • 오곡
박종진

신석기시대 이후 재배된 여러 종류의 곡물 중에서 중요한 곡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오곡(五穀)이 있다.5)오곡이라는 용어 외에 육곡, 팔곡, 구곡이라는 말도 썼는데, 이 용어에 포함된 곡식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이 용어들은 특정 곡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백곡(百穀)과 같이 곡식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오곡이 어떤 곡물인지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그 이유는 시기와 지역마다 중요한 곡물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 초기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권148, 광주목)에서는 오곡이 기록에 따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 후,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 기록에 대한 안사고(顔師古)의 주석과 그를 따른 주자의 주석을 좇아 서(黍), 직(稷), 숙(菽), 맥(麥), 도(稻, 벼)를 오곡으로 보았다. 그런데 중국 고대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변한(弁韓)의 땅은 오곡과 벼 심기에 좋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당시 오곡에 벼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 다. 그 당시의 오곡에는 벼 대신 삼(麻)이 포함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삼은 일찍부터 곡물보다는 옷감 재료로 많이 재배하였지만 아주 오래 전에는 삼을 곡식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이때 벼가 오곡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벼가 재배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벼는 특수한 계층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한 곡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지』보다 뒤에 편찬된 중국 사서인 『양서』 「동이전」에는 신라의 땅은 오곡을 심기에 적당하며, 뽕과 삼을 많이 심는다고 하여서 이 시기에는 삼이 오곡에서 빠져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오곡에는 삼 대신 벼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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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오곡에는 일반적으로 서, 직, 맥, 숙(혹은 두)이 포함되었으며, 여기에 시기에 따라 삼과 벼가 추가되었다. 서(기장), 맥(보리), 두(콩), 도(벼)가 어떤 곡식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직이 어떤 곡식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전에는 직을 서와 함께 기장의 한 종류로 보고 있지만 같은 종류의 곡물이 동시에 오곡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직을 패(稗)와 혼용하여 직을 피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 초기에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에서 직을 피로 새긴 후 조선시대 농서의 대부분은 직을 피로 새겼다. 그렇지만 직은 예로부터 매우 중요한 곡식으로 여겨서 오곡의 대표(五穀之長)를 가리키기도 하고 곡식의 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곡물을 대표하는 직이 “곡물이 익지 않으면 피만도 못하다.”고 한 맹자의 말처럼 예로부터 하찮은 곡물로 인식된 피를 가리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오곡에 포함된 직은 어떤 곡식일까? 이 실마리를 푸는데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의 「본리지(本利志)」 곡물고(穀物考)가 참고 된다. 이에 의하면 직은 바로 속(粟, 조)이며, 특히 한나라 진(晉)나라 이전의 기록에서 직은 반드시 속을 가리켰다고 한다. 그래서 『관자』, 『월령』, 『회남자』, 『사기』, 『제민요술』 등에서는 직과 속 중 하나만 기록했으며, 두 개의 곡식을 같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는 예로부터 백곡의 장으로 여겨서 곡(穀)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한 곡물이었으며, 속(粟·續)으로 불린 것은 쌀과 보리를 이어주는 식량(接續之糧)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추론을 통하여 볼 때 삼이 오곡에서 빠진 이후 오곡에 포함된 곡물은 기장(黍), 조(稷), 콩(豆), 보리(麥), 벼(稻)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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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시대 오곡에 대해서는 아직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앞에서 인용한 『세종실록지리지』 각 군현의 토의(土宜)에는 오곡 외에 속(조)을 따로 기록하고 있으며, 『농사직설(農事直說)』, 『금양잡록』, 『산림경제(山林經濟)』 등 주요 농서에도 속과 직을 모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그것은 서유구가 『임원경제지』 「본리지」 곡명고(穀名考)에서 지적하였듯이 조선시대 농서를 저술한 사람들이 옛 문헌에서 직이 조(粟)를 가리킨 것을 모른 채 직과 패(稗, 피)를 혼동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금양잡록』에서는 속은 조로 직은 피로 새겼는데, 이 오류가 그대로 『산림경제』로 이어졌다. 결국 『농사직설』 단계에서부터 피를 가리키는 한 자로 패 대신 직으로 잘못 써 왔는데, 이 잘못이 서유구가 바로잡을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서유구는 「본리지」 곡명고에서 『금양잡록』 이후 소개된 피의 한자 이름 ‘해아직(孩兒稷)’ 등을 ‘해아패(孩兒稗)’ 등으로 바로잡아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농서 연구자들이 이를 지적하지 않은 채 직을 피로 새기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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