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1장 땅에서 나는 우리 음식 재료
  • 2. 빼놓을 수 없는 보조 음식, 채소
  • 조선 후기에 새로 들어온 채소
박종진

고대 이래로 사람들이 재배하여 먹었던 채소의 종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전래된 몇몇 채소 중에는 우리 식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들이 있으니, 고추, 고구마, 감자, 호박, 토마토 따위이다.

우리 고유 음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김치를 비롯하여 우리 음식에는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거의 없을 정도로 현재 우리 식생활에서 고추는 뗄 수가 없다. 그렇지만 고추가 이 땅에 전래된 것은 16세기 이후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고추가 전래되기 이전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향신료로 초(椒·川椒·山椒)와 겨자를 주로 사용하였다.11)인도 원산의 후추(胡椒)가 중국에 들어왔지만 후추는 매우 귀했기 때문에 향신료보다는 약으로 쓰였다. 『고려사』에는 공양왕 원년 유구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1975년 인양된 14세기의 중국 무역선인 신안선에서도 후추가 발굴되었다. 후추가 향신료로 사용된 것은 널리 보급된 후의 일이다. 남미가 원산인 고추는 대체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일본을 통하여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전래 시기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추가 조선 후기의 책에 고초(苦草), 번초(蕃椒), 남초(南椒), 남만초(南蠻草), 왜초(倭草), 왜겨자(倭芥子)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된 까닭은 당시 고추의 전래와 관련된 확실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추에는 큰 독이 있다고 소개한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당시 술집에서는 고추의 매운 맛을 이용하여 소주에 고추를 섞어서 팔아 그 술을 마신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사용되던 고추는 김치와 만나게 되면서 이름값을 높이게 된다. 이전까지 김치는 주로 소금에 절이는 것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고추를 사용하게 되면서 김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김치에 고추를 사용한 대표적인 예로 1766년 유중림(柳重臨)의 『증보산림경제』에 소개된 ‘침나복함저법(沈蘿葍醎菹法)’과 ‘황과담저법(黃瓜淡菹法)’이 있다. 침나복함저법은 잎줄기 달린 무에다 청각·호박·가지 등의 채소와 고추·천초·겨자 등의 향신료를 섞고 마늘 즙을 넣어서 담은 것으로 오늘날의 총각김치와 같은 것이고, 황과담저법은 어린 오이의 세 면에 칼 자리를 놓고 속에다 고춧가루 마늘을 넣어서 삭힌 것으로 오늘날의 오이소박이다.12)이성우, 『한국 식품 문화사』, 교문사, 1984, 113쪽. 또한 고추를 사용하면서 김치에 젓갈을 넣을 수 있게 된 것도 큰 변화의 하나이다. 16세기 말 우리 땅에 들어온 고추는 18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김치에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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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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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들어와 널리 재배되었던 것이 고구마와 감자이다.13)김재승, 「고구마의 조선 전래」, 『동서 사학』 8, 한국 동서 사학회, 2001. 고구마는 현재 한반도 남부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녹말이 주성분인 아열대 작물이다. 중남미가 원산인 고구마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진출 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가 다시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으로 전해졌는데, 이것이 중국-유구-일본(대마도)을 거쳐 조선에 전래되었다. 1763(영조 39)년 조선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趙曮)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 부산에 종자를 보낸다. 조엄이 대마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고구마를 효자마(孝子麻)라고도 하였는데, 그 일본 발음이 고귀위마(古貴爲麻)였던 것에서 고구마란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다. 조엄이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부산에 보낸 이듬해 봄 부산진 첨사 이응혁(李應爀)은 절영도(絶影島, 부산 영도)에서 시험 재배를 시작하였고, 1765년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는 고구마 재배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강필리는 『감저보(甘藷譜)』를 저술하여 고구마 보급에 공헌하였는데, 지금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후의 책에 『강씨감저보』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이후 고구마는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보급되었고 이와 함께 관련 저술도 이어졌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김장순(金長淳)의 『감저신보(甘藷新譜)』(1813)와 서유구의 『종저보(種藷譜)』(1834)이다. 이렇게 고구마가 빠 른 시일 안에 널리 퍼진 것은 고구마가 가뭄이나 해충의 폐해를 잘 받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서 곡물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맛이 좋고 수확이 많아서 구황 작물(救荒作物)로 적합하였기 때문이다.14)『정조실록』 권41, 정조 18년 12월. 1798년(정조 22) 정석유(鄭錫猷)의 상소에서 고구마가 구황에 제일이라면서 고구마 재배를 권장한 것을 보면15)『정조실록』 권50, 정조 22년 11월 기축. 전래한 지 30여 년 만에 구황 작물로서의 위상을 점차 굳혀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지배층의 침탈로 고구마 재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정조 때의 기록은 당시 고구마의 보급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런 까닭으로 조선 후기까지 구황 작물로 주로 심었던 것은 메밀이었으며, 고구마가 확산된 것은 일제 강점기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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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감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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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이 감자인데, 감자 역시 원산지인 남미에서 스페인으로 전파되었다가 다시 인도-중국-만주를 거쳐 우리나라 북부로 전래되었다. 감자는 북저, 북감저, 마령자라고 하였는데 전래 시기에 대해서 이규경(李圭景, 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1824∼1825년(순조 24∼25)경으로 보았으니, 대개 고구마보다 약 60년 정도 전래가 늦은 셈이다. 그렇지만 감자 역시 번식력이 좋은 데다가 고구마보다 추위나 가뭄, 홍수에 강하였기 때문에 북부와 동부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서 보급 정도는 고구마를 능가하게 되었다. 감자 재배와 관련된 책으로는 조성묵(趙性默)의 『원서방(圓薯方)』(1832)과 김창한(金昌漢)의 『원저보(圓藷譜)』(186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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