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1장 땅에서 나는 우리 음식 재료
  • 2. 빼놓을 수 없는 보조 음식, 채소
  • 채소의 유통과 판매
박종진

채소가 생활의 필수품이 되면서 자급자족용이 아니라 팔기 위해서 재배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고려시대의 경우 이런 현상이 일반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중기에 국학학유(國學學諭)를 지냈던 김수자(金守雌)는 벼슬을 버리고 전원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면서 채소를 길러 팔아서 먹고살면서 아동들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17)『고려사』 권98, 열전11, 김수자. 물론 김수자가 전문적으로 채소를 재배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일시적으로 채소를 팔아서 생활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또 고려 명종 때 숙종의 증손 왕공(王珙)은 성품이 탐욕스러워 가노를 보내어 값을 주지 않고 시장 물품을 강탈하였고 심지어 땔나무와 채소, 과일까지도 빼앗았으며, 판 사람이 혹 값을 요구하면 때리고 욕을 보여서 사람들의 고통이 컸다고 한다.18)『고려사』 권90, 종실, 숙종. 비록 단편적인 사례이지만 개경의 시장에서 채소가 과일, 땔나무와 함께 팔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개경 주위의 절에서도 채소를 경작하였고, 이 중의 일부는 유통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려시대에는 절에서 마늘이나 파 같은 채소를 경작하고 더 나아가서 이를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일이 많아서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이런 정황에서 보면 개경 주변의 크고 작은 절에서 다양한 채소를 경작하고 이를 시중에 판매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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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과 들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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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전문적인 재배와 판매는 조선시대 이후 더욱 늘어났다. 서울 주변에는 땔나무와 채소 판매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에 따른 여러 문제들을 찾을 수 있다. 1425년(세종 7)에는 화폐의 강제 유통이 땔나무나 채소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폐해가 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1445년(세종 27)에는 변동이 심한 채소 값은 경시서(京市署)에서 정하도록 하여 채소 등을 팔아서 먹고사는 소시민을 배려하는 사례들이 보인다. 이것은 당시 한양에는 땔나무나 채소를 팔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증거이다. 반면 무뢰배들이 소상인들의 채소를 강탈하거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빌미로 소상인들의 판매를 금지하는 문제도 나타난다. 특히 조선 후기 수박과 참외의 판매는 계속 확대되었는데, 19세기에는 채소전과 과물전이 수박과 참외 판매권을 놓고 갈등을 벌이기도 할 정도로 채소의 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채소는 오래전부터 곡물을 보완하는 주요한 식량으로, 입맛을 돋우는 양념으로, 출출할 때 먹는 간식으로, 불편한 몸을 다스리는 약재로 널리 쓰였다. 이와 관련하여 『산림경제』 치포에서는 “곡식이 잘 되지 않는 것을 기(饑)라 하고 채소가 잘 되지 않는 것을 근(饉)이라 하니 오곡 이외에는 채소가 또한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이런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에는 소위 웰빙 식품으로 유기농 채소가 비싼 값으로 팔리고 있다. 다만 몸에 좋다는 채소도 무작정 많이 먹어서 될 일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이 되는 채소가 나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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