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1장 땅에서 나는 우리 음식 재료
  • 4. 늙어야 먹을 수 있었던 육식 재료, 가축
  • 국가의 가축 사육과 정책
박종진

국가 차원에서 가축을 사육하고 관리한 유래는 오래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국가 초기부터 희생용 동물을 관리하는 장생이라는 관리가 확인되는데, 이와 함께 관련 관청도 있었다. 백제에는 22관서 중 내관에 마부(馬部)가 있었으며, 신라에는 양전(羊典), 목숙전(苜蓿典) 등의 관청이 있었다. 특히 신라의 내성 산하에는 백천목숙전(白川苜蓿典), 한지목숙전(漢祗苜蓿典), 문천목숙전(蚊川苜蓿典), 본피목숙전(本彼苜蓿典) 등이 있었는데, 이들 관청은 목숙이라는 말 사료를 재배하고 관리하던 관청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한지·본피 등 6부의 명칭을 가진 목숙전의 이름인데, 이것은 당시 마료 관리를 위해 설치된 관청이 부 단위로 설치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신라 내물왕 때에는 내구(內廐)의 용례가 확인되며,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서는 승부(乘府)와 승부령, 승부경 등을 찾을 수 있다. 아울러 통일 직후 신라에 174곳의 말 목장(馬阹)이 있어 말의 사육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사복시(司僕寺), 전구서(典廐署), 전목서(典牧署·典牧司), 상승국(上乘局) 등 말 사육을 직접·간접적으로 관여하였던 관청이 있었으며 희생용 동물을 사육하고 관리하던 장생서도 확인된다. 아울러 1162년 (의종 13)에는 전목사에서 전국 목장(牧監場)에서 사육하는 말을 비롯한 가축에 주는 사료의 종류와 양을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전마(戰馬)인 경우 동절기인 황초절에는 피(稗) 1두, 콩(豆) 2승, 콩가루(末豆) 4승을 주었으며, 하절기인 청초절에는 피 1두, 콩가루 3승을 주었다.44)『고려사』 권82, 병2, 마정.

물론 국가에 필요한 가축을 사육하고 관리하는 관청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시기에 따라 제도의 변천이 많았지만 대체로 중앙에는 병조의 속사로 사복시를 두어 목장과 말 사료 관리를 비롯한 말 사육 전반을 담당하였으며, 지방에는 각도의 관찰사 밑에 감목관(監牧官)을 두고 이를 수령이 겸하게 하여 각 지방의 목장을 관할하였다.45)남도영, 『한국 마정사』, 한국 마사회, 1996.

이렇게 국가 차원에서 사육하고 관리하였던 대표적인 동물은 말이었다. 말은 군사적으로나 교통수단으로 가치가 아주 높았기 때문이다. 소 역시 농업용으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이렇듯 소와 말은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도살을 금지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금령은 고려시대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소와 말이 도살되어 제수용이나 식용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무인 정권 때 활동하였던 임익돈(任益惇)은 1212년(강종 1) 안동에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관내 산촌에서 농사짓는 소를 잡아 산신(岳廟)에 제사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46)김용선 편, 『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譯註高麗墓誌銘集成)』, 「임익돈묘지명(任益惇墓誌銘)」, 한림 대학교 아시아 문화 연구소, 2001. 충숙왕은 1325년(충숙왕 12) 2월 교를 내려서 악소배들이 떼를 이루어 소와 말을 훔쳐서 잡아먹는 일을 살펴서 잘 다스리라고 하였다. 동시에 충숙왕은 소와 말을 도살하지 말고 닭, 돼지, 거위, 오리를 길러서 빈객 접대와 제사에 사용하게 하라고 하였다.47)『고려사』 권85, 형법(刑法)2, 금령(禁令).

소와 말의 도살 금지는 고려 말 이후 우마의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흔들리면서 더욱 강조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홍건적이 우마를 많이 잡아먹어버려 우마를 보호하기 위해서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기에 이르렀으며,48)『고려사』 권77, 백관(百官)2, 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 고려 말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은 이후 명나라의 거듭된 공마(貢馬) 요구는 말의 부족을 부채질하였다. 더욱이 조선 건국 후에는 군 사용뿐 아니라 교통 운송용으로 말의 수요가 폭증하면서 공급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와 함께 우마육의 수요도 증가하여 우마의 도살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조선 초부터 고려 말의 제도를 따라서 우마 도살을 금하고 도살을 일삼는 백정을 도성 밖으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세조 때 양성지가 옛날에는 백정(白丁)과 화척(禾尺)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서울과 지방의 일반 양민들도 모두 소를 잡으며, 옛날에는 흔히 잔치를 준비하기 위하여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 안에서 판매하기 위하여 잡고, 옛날에는 남의 소를 훔쳐서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에서 도살을 한다고 할 정도로 우마의 도살은 성행하였다.49)『세조실록』 권41, 세조 13년 정월 신미. 이와 함께 조선시대에는 소와 말을 훔치는 행위가 사회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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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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