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2장 국가 의례의 음식
  • 2. 경건하면서도 기쁘게 제사를 지내다
  • 국가의 제사는 누구에게 지내나
임혜련

길례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은 크게 하늘·땅·인간이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원구(圓丘)에서 지낸다. 우리나라는 고대 사회에서부터 이미 제천 의례가 있어 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가 각기 “하늘 및 산천에 제사하였다.”, “단을 쌓고 하늘과 땅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60)『삼국사기』 권32, 지(志)1, 제사(祭祀). 하늘에 대한 제사는 고려시대로 이어져서 983년(성종 2) 정월에 원구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61)『고려사』 권59, 지(志)13, 예(禮)1, 길례제사(吉禮祭祀) 원구(圓丘). 이렇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례는 고려 말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는 성리학이 도입되고 정착되면서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명나라를 천자국(天子國)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르면 왕은 천명(天命) 곧 하늘의 명을 받은 존재이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하늘의 명을 받은 천자에게 책봉을 받은 왕이 조선의 왕이라 인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렇듯 조선시대 길례에서 제외되었던 원구에서의 제사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 하고 황제로 즉위하게 됨으로써 조선 말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땅에 대한 제사는 사직(社稷)에서 지낸다. 사직에서는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농업이 중요했던 시대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는 농업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농업의 무대라 할 수 있는 토지와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은 경제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 민본 정치를 지향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윤택한 삶을 추구하였고, 이는 농업의 성패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사직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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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단과 황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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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제사는 종묘(宗廟)에서 지낸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국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다. 나라를 건국하고 기틀을 다진 왕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종묘였던 만큼 왕조 국가에서 가장 격식을 갖춘 의례를 거행하던 곳이 바로 종묘였다.

<표> 길례의 종류
규모 제사 대상
대사 사직, 종묘
중사 풍운뢰우(風雲雷雨), 해악독(海嶽瀆),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묘(文廟), 역대 시조(歷代始祖), 우사(雩祀)
소사 영성(靈星), 노인성(老人星), 마조(馬祖), 명산대천(名山大川), 사한(司寒), 마제(禡祭), 영제(禜祭), 포제(酺祭), 칠사(七祀), 둑제(纛祭), 여제(厲祭)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은 이뿐만이 아니다. 제사의 규모에 따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나누었다. 종묘와 사직에서의 제사는 가장 규모가 큰 대사에 해당한다. 중사로는 문선왕(文宣王,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 선농단(先農壇) 제사나 춘추 중월의 역대 시조에 대한 제사 등이 있는데, 대사보다 의식이 간단하다. 소사로는 명산대천, 칠사 등 다양한 대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국가의 제사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종묘와 사직에서의 제사이다. 종묘와 사직은 나라의 젖줄로서 국가와 왕실 바로 그 자체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국왕들이 종묘사직이라고 하면 이는 바로 국가와 왕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직과 종묘에서의 제사는 조선이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고 전주 이씨를 왕실로 한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행사였다. 이에 국왕은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하는 경우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는 반드시 모시고 가서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그만큼 사직과 종묘 제사는 왕조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례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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