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2장 국가 의례의 음식
  • 5. 활쏘기로 하나가 되다
  • 왕과 신하가 활 솜씨를 겨룬 대사례
임혜련

대사례(大射禮)는 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 시합을 통해 군신 간의 예를 확인하는 행사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하였다. 중국에서 우리 민족을 지칭할 때 ‘동이(東夷)’라고 했는데, 이때 ‘이(夷)’ 자는 활 궁(弓)이 포함된 글자로 동이는 ‘동쪽의 활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 행위만은 아니었다. 『주례』에는 활쏘기를 예(禮)·악(樂)·어(御)·서(書)·수(數) 등과 함께 육예(六藝)의 하나로 중시하였다. 또한 『논어』, 『맹자』, 『예기』등의 유교 경전에서도 심신의 수양을 가져오는 행위로 ‘사(射)’를 중시하였다. 또한 활을 쏘는 사례(射禮)는 군신의 화합에 중요한 요소였으며, 인(仁)의 길이기도 하였다. 이에 대사례를 행함으로써 문무(文武)가 하나가 되고, 이후 베푸는 회례연(會禮宴)을 통해 국왕과 신하가 일체(一體)가 된다고 하여, 여기에는 예악과 문무와 군신 상하의 도가 빠지지 않고 갖춰져 있다고 여겼다.115)『성종실록』 권83, 성종 8년 8월 경자.

곧 대사례는 군신 간의 화합과 예를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왕권의 과시를 추구하였던 의례였다. 태종·세종·세조대에 대사례의 설행을 논의만 하였을 뿐 실제 행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1477년(성종 8) 성종이 성균관에 나와서 선성(先聖)들에게 석전(釋奠)의 예를 드리고 명륜당(明倫堂)에서 과거를 보인 뒤 사단(射壇)에 나가 대사례를 행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로 나타나는 대사례 거행 모습이다. 이후 연산군·중종·영조대에도 대사례가 시행되었다. 중종은 반정으로 즉위한 이후 민심을 수습하는 방책으로 국가적인 행사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대사례를 설행하였으며, 연산군대의 대사례가 군신의 연회로 끝났음을 비판하였다. 중종 이후로 대사례는 오랜 기간 시행되지 못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경제·사회적으로 여유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00여 년 동안 정지되었던 대사례는 영조대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다시 시행하였다. 영조는 대사례를 시행하면서 200년 만에 국가의 예법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자신이 50세가 되는 해에 이 행사가 열리게 되는 것을 무척이나 감격스러워 하였다.116)신병주, 「영조대 대사례의 실시와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한국학보』 106, 일지사, 2002, 66∼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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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쏘는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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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례는 병조(兵曹)에서 행사를 담당하였다. 영조대 대사례의 거행 모 습을 기록한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는 당시의 현장 모습과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대사례의궤』에는 세 장면의 그림이 기록되어 있는데, 왕이 활 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례도(御射禮圖)’, 신하들이 활 쏘는 모습을 그린 ‘시사례도(侍射禮圖)’,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과정을 그린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행사가 진행되는 순서에 따라 그려져 있다.

1743년 윤4월 7일 영조는 창덕궁 영화당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성균관으로 향하였다. 많은 신하들과 종친(宗親), 의빈(儀賓)들이 국왕을 수행하였다. 대사례가 성균관에서 열린 이유는 국왕이 친히 유생들을 격려하고 심신의 수양을 쌓을 것을 권장하려는 취지에서 나왔다. 성균관 유생들 모두가 국가로부터 장학금과 각종 물품을 무상 지급받았던 것이나, 대사례를 비롯하여 왕세자의 입학 의식을 이곳에서 열었던 것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기대를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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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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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나온 영조는 창덕궁과 잇닿아 있는 성균관의 하련대(下輦臺)에 이르러 가마를 내렸다. 임시 숙소인 악차(幄次)에 들어가서 제복인 면복(冕服)으로 갈아입은 후 성균관 문묘에서 선현들을 참배하는 의식인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악차로 돌아온 영조는 성균관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이곳에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과 유생들을 격려한 후 본 행사인 대사례를 시작하였다.

왕의 자리는 남쪽을 향하여 설치된다. 왕이 활을 쏘는 과녁을 ‘웅후(熊侯)’라고 부르는데, 곰 가죽으로 장식한 과녁이다. 『주례』에 천자는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한 ‘호후(虎侯)’를 사용하고, 제후는 웅후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조선의 왕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웅후를 사용한 것이다. 과녁은 활을 쏘는 장소에서 90보 떨어진 곳에 세운다. 왕은 사단(射壇)의 중앙에서 활을 쏘게 된다. 사단 아래에는 3개의 붉은 탁자가 있는데, 여기에는 각각 왕의 소지품과 활, 화살을 두었다.117)『국조속오례의』 권4, 군례(軍禮), 대사의(大射儀).

왕과 함께 활을 쏘는 신하들은 3품 이상은 사단 위에서, 3품 이하는 사단 아래에서 활을 쏘는데, 그 위치는 서쪽 계단 앞이다. 신하들은 각기 두 명씩 나와서 활을 쏘게 된다. 신하들이 활을 쏘는 과녁은 미후(麋侯)라 하는 푸른색의 사슴머리 표적으로, 왕의 표적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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