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3장 특별한 날, 특별한 음식
  • 2. 생일날 잘 먹으려고 이레 굶는다
  • 첫 생일, 돌상 차림
윤성재

첫 돌은 수일(睟日)·주일(周日)·주년(週年)이라 하는데, 아기가 출생하여 처음으로 맞는 생일을 말한다. 아기의 나이를 셀 때 한 살을 첫 돌, 두 살을 두 돌, 세 살을 세 돌이라고도 하지만, 보통 돌이라고 하면 첫 돌만을 가리킬 때가 많다. 돌을 맞이했다는 것은 생의 한 고비를 넘기고 이제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날은 아기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되지만 그 집안으로서도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돌잔치를 베풀어 아이의 수명이 길어지기를 빌고 건강하게 주어진 복을 누리며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돌잔치 풍습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중국 문헌 중에서 첫 돌에 대하여 처음 보이는 언급은 6세기 무렵의 『안씨가훈(顔氏家訓)』에 “강남 풍속에 아이가 태어나 한 돌이 되면 새 옷을 짓고 목욕을 시키고 장식을 단다. 남자는 활과 화살과 종이와 붓을, 여자는 칼과 자와 바늘과 실을 쓴다. 또 음식물과 진귀한 옷과 장난감을 아이 앞에 차려 놓고 그 아이가 생각하여 갖는 것을 보고, 탐욕스럽거나 청렴하거나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것을 시험한다. 이것을 아이 시험(試兒)라고 한다. 친가·외가가 모여 잔치를 벌이고 즐긴다.”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지봉유설(芝峰類說)』(1634)을 지을 때에 그대로 인용할 만큼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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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도호연(初度弧宴) 세부
초도호연(初度弧宴)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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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정조 15) 6월 18일 원자(훗날의 순조)가 갖가지 놀잇감을 담은 소반 앞에 앉아 채색 실을 집고 다음으로 화살과 악기를 집는 돌잡이를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같은 돌잔치 풍습이 궁중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140)『정조실록』 권32, 정조 15년 6월 신유. 양반가의 경우에는 16세기를 전후하여 돌잔치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선 중기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손자 숙길이 태어나서 1년 되는 날 돌잡이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고,141)이문건(李文楗), 『양아록(養兒錄)』 임자년(1552) 정월 5일. 오희문(吳希文, 1539∼1613)도 손자 효립의 생일에 장난감을 앞에 벌여 놓고 먼저 집는 물건을 보았다고 일기에 썼다.142)오희문(吳希文), 『쇄미록(瑣尾錄)』 무술년(1598) 8월 18일.

이처럼 돌상에 쌀·흰 타래실·책·종이·붓·활과 화살(또는 가위·바늘·자) 등을 놓고 무명필을 깔아 아기를 앉혀 놓고 상 위의 물건을 마음 대로 집도록 하는데, 이를 ‘돌잡이’라 한다.143)아기가 무엇을 집는가를 보고 아이의 장래를 점친다. 즉, 실타래를 잡으면 아기가 오래 살 것이며, 책이나 붓 또는 벼루를 잡으면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으로 믿는다. 무예가 뛰어난 장군이 되라는 뜻으로 활과 화살은 남자 아이의 상에 놓으며, 자(尺)나 가위 또는 수실은 바느질 솜씨와 손재주가 있으라는 뜻으로 여자 아이의 상에 놓는다. 돈은 부유하게 살라는 뜻이고, 쌀은 재물 복이 있으라는 뜻인 동시에 평생 식복(食福)이 있기를 기원하는 의미이고, 국수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대신 떡을 집으면 아이가 미련할 것이라고 여겨 싫어한다. 이러한 첫돌 의례가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대체로 16세기 중반 이전에 양반가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돌잔치에 차리는 상은 고임상(高排床)처럼 음식을 고이는 상이 아니라 음식을 수북이 담아 풍성하게 차리는 상차림이다. 돌잔치 음식상을 수반(睟盤)이라고 하는데, 궁중에서는 백완반(百玩盤)이라고 하였다. 돌상은 다리 달린 둥근상(原盤)을 사용하는데 이는 걸음이 서툰 아기가 모서리에 부딪혀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원반 옆에 곁상으로 반상이 놓이는데 여기에는 새로 마련한 밥그릇과 국그릇에 흰밥과 미역국을 차린다. 또 지역에 따라 푸른색의 나물을 상에 올리기도 한다. 대개 미나리를 올리는데 왕실에서는 미나리 한 단을 홍실로 묶어 놓는다. 미나리는 축축한 땅에서는 어디서나 잘 자라고, 사철 내내 자라는 식물로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을 자랑한다. 따라서 미나리가 지닌 생명력은 장수를 의미하고 번식력은 자손의 번창을 상징한다. 과일은 대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과일을 놓는데, 대추가 많은 열매를 맺듯이 자손이 번영하라고 축복하는 뜻이다.144)이규숙 구술, 김연옥 편집, 『이 “계동 마님”이 먹은 여든 살』, 뿌리 깊은 나무, 1992, 140쪽 ; 이춘자, 『통과 의례와 음식』, 대원사, 1997,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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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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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충북 지방 노동요에 보이는 음식들은 돌상에 올라가는 대표적인 음식들이다. 백설기와 수수팥떡, 국수가 그것이다.

박달낭구 절굿대에 느티낭구 통에다가 / 콩콩콩콩 소리좋다

우리아기 돌잔치에 백설기요 수수팥떡 / 국수 삶아 받쳐놓고

실타래에 금전운전 무병장수 빌자한다 / 고루고루 콩콩찌라145)임동철·서영숙 편, 『충북의 노동요』, 1997, 57쪽.

이 가운데 떡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백설기와 수수팥경단은 반드시 상에 올린다. 백설기는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신성함과 정결함을 뜻하며, 수수팥경단은 액을 물리치는 의미 외에 넘어지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 밖에 송편과 여러 가지 종류의 절편 등을 더 놓기도 한다. 국수는 아기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놓는다.

돌에도 떡돌리기를 하는데 1791년 원자의 돌잔치 날 왕실에서는 종실 대신 제신(諸臣)과 대궐에서 수직하는 낭관, 장수 호위 군사 및 서리 하인, 군졸과 큰 길거리에 사는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내렸다. 원래 돌이 되면 아기가 걸을 수 있기 때문에 아기가 떡을 돌리기도 한다. 돌떡을 받은 집에서는 돌떡을 담아온 그릇을 씻지 않고 그 그릇에 물건(의복, 돈, 반지, 실, 수저, 밥그릇, 완구 등)이나 돈을 답례로 대신 주었다.146)강인희·이경복, 앞의 책, 189쪽. 요즘에는 금으로 만든 반지나 팔찌 따위를 돌 선물로 주는데 이것은 20세기 초 조선에 들어온 중국인들의 풍속이다. 중국인들은 축하할 일이 있으면 금은붙이로 반지나 팔찌 등을 선물하는데, 이것을 본 조선인들이 돌잔치 때 반지를 선물하면서 이것이 풍속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까지도 옷감이나 쌀로 돌 선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147)주영하,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사계절, 2005, 181∼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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