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3장 특별한 날, 특별한 음식
  • 3. 국수는 언제 먹여 주나
  • 신랑, 신부의 큰상
윤성재

초례가 끝나면 신랑은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대청에서 큰상을 받고, 신랑을 따라온 상객(上客)과 후행(後行)은 신랑이 받은 것과 같은 큰상을 사랑에서 받는다.

조선 후기에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지은 『김신부부전(金申夫婦 傳)』에는 혼례날 큰상차림이 보인다. 김신 부부의 혼례 날 숙수(熟手)는 갖은 솜씨를 부려 큰상을 차려냈다. 우선 떡으로 증병(蒸餠)과 인절미와 가래떡(權母)과 백설기와 송편을 올리고, 국수로는 난면(卵麵)과 산면(酸麵)을 차렸으며, 유밀과와 홍산자(紅糤子)와 중박계(中白桂)와 다식(茶食)과 양색 요화(兩色蓼花)에 각색 강정과 같은 밀병162)밀병(蜜餠)은 약과(藥果)·대계(大桂)·중박계(中朴桂)·홍산자·백산자·빙과(氷果)·과과(瓜果)·봉접과(蜂蝶果)·만두과(饅頭果) 등으로 이는 모두 제사나 손님 접대에 사용한다(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권26, 설부(說部)5, 도문대작(屠門大嚼)).을 더하였다. 그 밖에 어만두(魚饅頭)와 어채(魚菜), 구장(狗醬)과 연계유(軟鷄濡), 어회(魚膾)와 육회(肉膾)와 양지머리 수육, 전육화(剪肉花)와 화약누르미(花藥訥飮伊), 돼지고기와 사슴고기, 잡탕(雜湯)과 탕평채(蕩平菜), 화채를 올렸으며, 사과·능금·유행(柳杏)·자두·배·밤·대추·참외·수박 같은 실과도 차렸다. 또 이러한 상에 수팔련(繡八蓮)을 꽂아 호화롭게 연출하였다.163)정조 때 경성 안에 사족(士族)의 남녀로서 김희집(金禧集)과 신씨(申氏)의 딸이 있었는데, 가난하여 결혼하기 어려웠다. 임금께서는 유지를 내리고 특별히 호조에 명하여 비용을 내려 혼인을 하도록 하되, 무릇 복식·음식·여러 가지 의물을 당시 시속(時俗)의 제일등례(第一等例)에 따라 행하게 하였다. 곧 호조 판서 조정진(趙鼎鎭)에게 명하여 남자 집 혼사를 주재케 하고, 선혜청 당상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하여 여자 집 혼사를 주재케 하고,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에게 명하여서는 『김신부부전』과 『동상기(東廂記)』를 짓게 하였다(이능화, 앞의 책, 187∼188쪽). 현재 남아 있는 『김신부부전』의 판본은 여러 가지인데, 이 글에서는 한남서림본 『동상기찬(東廂記纂)』(1918)에 나온 음식을 기준으로 삼았다. 각종 떡과 국수, 과자(菓子)가 주 메뉴를 이루고, 약간의 생선과 고기 종류, 생실과 등을 차린 상인데, 이것이 왕의 명령에 따라 제일 호화롭게 연출한 큰상의 음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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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결혼 잔치
시골 결혼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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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 때의 큰상은 조선 초기부터 그 모습이 보인다. 조선 태종 때 기사에 따르면 “지금 혼인하는 집에서는 사위를 맞이하는 날 저녁에 성찬(盛饌) 을 차려서 먼저 사위의 종자(從者)를 먹이고, 또 3일에 유밀과상(油蜜果床)을 차려 ‘큰상(大卓)’이라 하는데, 이것으로 사위와 신부에게 잔치를 베풀고 나머지 음식을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집에 보낸다.”고 하였다.164)『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 1월 계유. 이로 보아 큰상차림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으며, 유밀과를 주로 차리는 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가 되면 3일 잔치 없이 당일에 합근례를 행하며, 큰상으로 잔치를 차렸던 것 같다.165)남원에 사는 김장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와 “혼례에 3일 잔치를 해야 합니까?” 하고 묻기에 내가 “서울에서도 수년 이래로 당일에 합근의 예를 행하고 다시 3일 잔치를 행하지는 않으니 이것이 간편하고 합당합니다.”고 답하였다(『미암일기』 병자년(1576, 선조 9)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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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연석(新婦宴席)
신부연석(新婦宴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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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랑이 받은 큰상은 먹는 것이 아니며, 신부가 신랑 집에 가지고 가서 동네 사람과 나누어 먹고, 신랑은 따로 차린 입맷상을 먹는다. 이렇게 음식을 만들어 시가에 보내는 것을 ‘장반(長盤)’이라 하였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이바지(이받이) 음식이다. 장반은 일가와 손님들에게 신부 집의 경제력과 가풍을 보여 주는 것이었기에 돈을 빌려서라도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보내는 폐단까지 있었다.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서 가지고 온 이 음식을 동네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

한편 신부는 폐백을 마치고 시어머니로부터 큰상을 받는다. 보통 색시 상이라 부르는데 이 큰상도 역시 먹는 것이 아니며, 음식은 모두 신부 집으로 보낸다. 신부를 따라온 후행과 대반도 신랑의 상객과 후행처럼 역시 동일한 큰상을 받는다. 이러한 절차를 통하여 신랑 측(상객, 후객)과 신부 측(후객, 대반)은 신랑과 신부가 먹다 남긴 큰상의 음식 나머지를 서로 맞바꾸어 먹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이들 신랑·신부가 먹다 남긴 음식은 신(神)이 먹다 남긴 음식이기도 하다. 신이 먹다 남긴 음식은 신랑과 신부가 먹고, 신랑과 신부가 먹다 남긴 음식을 맞바꾸어 양가의 가족들이 먹는 것이다. 결국 혼인 음식을 통하여 신과 신랑·신부, 그리고 그 가족들이 같이 먹고 같이 마시는 절차를 통하여 일체를 이룬다. 혼인 음식의 교환은 그러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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