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4장 명절 음식 , 그 넉넉함의 향연
  • 2. 천오백 년을 이어온 대보름 약밥
  • 약밥의 유래
이정기

정월 대보름의 대표적인 절식(節食)으로는 단연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들 수 있다. 묵은 나물이 조선 후기 기록에 보이는 것에 반해 오곡밥은 멀리 신라시대의 찰밥(糯飯)에서 유래를 찾는다.

21대 비처왕(신라 소지왕 10년) 때에 왕이 천천정(天泉亭)에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왕 앞에 쥐와 까마귀가 나타났다.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쫓아가 보라고 하여 왕이 사람을 시켜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가라고 하였다. 까마귀가 어느 연못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그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글을 올렸다. 그 글에는 “이 봉투를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되어 있었다.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일관(日官)이 한 사람은 곧 왕을 가리키므로 봉투를 열어 보도록 간청하였다. 봉투를 열어 보니 ‘射琴匣(거문고 상자를 쏘아라)’이라고 적혀 있어 금갑을 쏘았더니 내전에 드나드는 중과 궁주가 있었다. 이 둘은 왕을 시해할 계략을 짜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신라 풍속(國俗)에 매해 정월 첫 번째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 등에 모든 일을 조심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16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糯飯)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그렇게 한다.209)『삼국유사』 권1, 기이(奇異), 사금갑(射琴匣).

이 설화는 왕을 위험에서 구해 낸 까마귀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정월 16일에 찰밥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설화의 시기를 488년(소지왕 10) 정월 대보름의 일로 규정하고, 신라 때부터 보름에 까마귀를 제사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풍속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조선시대 여러 문집에서도 정월 대보름 찰밥(약밥)의 기원을 『삼국유사』의 이 설화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까마귀의 보은을 위해 왜 찰밥을 사용하였는지, 까마귀에게 먹이는 찰밥이 왜 정월 대보름 절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까마귀는 우리나라 전역에 서식하는 텃새이고, 큰 무리를 지어 움직이면서도 집단을 지도하는 새가 없다. 이 때문에 까마귀 떼를 가리켜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고 폄하하는 듯하다. 이렇듯 까마귀는 흔히 볼 수 있고 신이한 능력을 가졌다고 하기에는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는 새이다. 오히려 시대가 내려올수록 까마귀는 죽음을 가져오는 흉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시대 다른 설화인 ‘연오랑세오녀’나 ‘견우와 직녀 설화’에서는 까마귀의 긍정적인 역할을 담아내고 있다.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동해에 살던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자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고대 태양 신화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으며, 연오와 세오의 이름에 까마귀 ‘오(烏)’ 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까마귀와 연관이 있다.

또한 칠석의 견우직녀 설화에서도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떨어져 있는 견우와 직녀를 1년에 단 한 번, 칠월 칠석에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가 오작교(烏鵲橋)인데, 역시 까마귀와 연관이 있다. 이 두 설화에서도 까마귀의 비범한 역할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대의 까마귀에 대한 인식은 앞의 설화들에서처럼 유용한 정보를 알려 주는 신이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210)까마귀에 대한 인식은 어느 시점을 계기로 길조에서 흉조로 변화된 듯하다. 그러나 흉조로 전환된 시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어쩌면 시기와 상관없이 선악의 구분이 명확한 동물은 없다(천진기, 『한국 동물 민속론』, 민속원, 2003)는 지적처럼 까마귀도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동물일지도 모른다. 혹자는 6·25 전쟁 때 육식성을 띤 까마귀들이 시체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보고 까마귀에 대한 인식이 ‘까마귀 곧 죽음’으로 바뀌었다고도 하나 인식의 변화 시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은 『겸재집(謙齋集)』 권3의 한 시에서 “굶주린 갈까마귀 어두운 숲에서 우네”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의 처량하고 외로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까마귀의 존재는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또한 중국에서 전해진, 태양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삼족오(三足烏) 설화도 연오랑세오녀 설화처럼 까마귀와 태양 신화가 연결되어 있다. 삼족오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보이니, 태양에 사는 신이한 까마귀에 관한 이야기는 꽤 오래되었다.

이 밖에 까마귀의 곧은 성품을 표현한 이야기도 있다. 중국 한나라 때 어사부(御史府)를 맡고 있는 주부(主簿)의 판결이 매우 공정했는데, 매일 밤이면 어사부에 들까마귀 수천 마리가 나뭇가지에 모여 자고 아침이 되면 흩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이후에는 이처럼 까마귀가 깃드는 곳이 나라의 법을 집행하는 기관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언론 활동, 백관에 대한 규찰, 풍속을 바로잡는 일, 결송(決訟)을 통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풀어주는 일, 중대한 범죄인의 국문(鞠問) 등을 담당했던 사헌부(司憲府)를 오대(烏臺) 혹은 오부(烏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또한 까마귀를 공명정대한 성품의 상징으로 여겼던 데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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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저총의 삼족오
각저총의 삼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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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약밥(藥飯)은 왕을 구한 까마귀에게 보답하는 의미로 제사 지낼 때 올리던 음식이다. 이후에는 사당이나 조상에게 제사 지낼 때에도 사용하였고 제사 후 음복(飮福)을 통해 일반 사람들이 먹기도 하였다. 실제로 고려나 조선시대까지도 정월 대보름에 약밥을 만들어 새(까마귀)에게 먹이거나 제물로 올리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찰밥과 까마귀의 관계는 의문점으로 남는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대보름에 찰밥 대신에 약밥이 절식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역시 찰밥 대신에 약밥을 까마귀 제사에 제물로 사용하였다. 이는 약밥의 검은 빛깔이 까마귀의 검은 색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211)임동권, 「민속상으로 본 색채관」, 『한국 민속학 논고』, 집문당, 1971.

『동국세시기』에 상원에 약밥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고, 『열양세시기』에도 약밥으로 조상에게 제사도 올리고 손님도 대접하며 이웃에게 보내기도 한다고 하였다. 『세시풍요』에서는 시절 음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하 는 풍습이 까마귀를 제사하는 것으로부터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습을 통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정월 대보름-까마귀-약밥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상식 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최남선은 정월 대보름에 먹는 약밥과 이날 까마귀에게 약밥을 대접하는 것은 출처가 각각 다르다고 하면서 둘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더불어 까마귀에게 약밥을 먹이는 풍속은 없어지고 정월 대보름 안에 사람이 약밥을 먹어야 좋다고 하여 이맘때쯤 약밥 장사들이 서울에 많이 돌아다니는데, 약밥은 까마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음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이후에는 점점 약밥과 까마귀의 관련성이 적어지고, 정월 대보름의 절식으로만 남은 듯하다.212)서울에는 오곡밥이나 약밥이 까마귀에게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음식이 아닌 정월 대보름 절식으로만 남아 있으나 지역에 따라 까마귀밥을 주는 풍습도 여전히 남아 있다. 까마귀밥은 까마귀가 와서 먹을 수 있게 찰밥이나 약밥을 소쿠리에 담아 처마 끝이나 담장 위에 놓아두는 풍습인데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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