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4장 명절 음식 , 그 넉넉함의 향연
  • 2. 천오백 년을 이어온 대보름 약밥
  • 한 해의 질병을 다스리는 부럼과 귀밝이술
이정기

이 밖에도 대보름 풍속 중에서 먹을거리와 관계있는 것으로는 대보름날 이른 새벽에 하는 부럼깨기가 있다. 부럼은 약밥에 들어가는 밤, 잣을 포함하여 호두, 은행, 땅콩 같은 껍질이 단단한 과실이다.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부름’이라 하였다.213)부럼은 부름, 보름이라고 한다. 또한 강원도 지방에서는 여름이라고도 하는데, 여름은 곧 열매를 뜻한다. 달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서 보름의 결실을 이루고 다시 점점 줄어드는데, 이는 생명력과 관련된다. 곧 보름달은 잘 여문 열매로 파악하여 하늘의 씨앗인 열매를 의미하는 것이다(서정범, 「보름의 어원고」, 『국어 국문학』 51, 국어학회, 1971). 부럼깨는 풍속은 조선 전기까지 찾아보기 힘드나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러 문집과 세시기에서는 사례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부럼을 깨는 의미와 연결된 용어를 살펴보면, 『동국세시기』에서는 1년 동안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의미로 작절(嚼癤)이라 하기도 하고, 치아를 단단하게 하는 방법이라 하여 고치지방(固齒之方)이라고도 하였다. 『열양세시기』에서도 대보름에 밤 세 개를 깨무는 데, 이 밤을 가리켜 부스럼을 깨무는 과실이라는 의미로 교창과(咬瘡果)라 하고 혹은 작옹(嚼癰)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부럼을 깨는 풍속은 한 해 동안 종기나 부스럼으로 고통 받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딱딱한 껍질을 깨물어서 나는 소리로 역신을 쫓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럼깨기(부럼깨물기, 부럼먹기)는 보통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고 한 번에 깨물어져야 좋다고 한다. 한 번 깨문 것은 껍질을 벗겨서 먹지만 첫 번째로 깨문 것은 먹지 않고 버린다. 그런데 『세시풍요』와 『조선 상식 문답』에서는 부럼을 깨는 이러한 풍속에 대해 딱딱하고 단단한 과실을 깨무는 것이 오히려 이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보이기도 한다. 상당히 합리적인 지적이다. 이를 단단하게 하는 풍습으로 부럼깨기 외에 이굳히기(固齒)산적이 있는데, 쇠고기를 길쭉하고 얇게 썰어 양념한 다음 꼬챙이에 꿰어서 구워 먹는 음식이다.214)歲首固齒(세수고치)의 풍습은, 중국에서는 元日(원일)에 屠蘇酒(도소주)와 膠牙餳(교아당, 이굳이엿)을 먹는 풍습이 있고 일본에서는 연초에 齒固め(하가타메)라 하는 의식이 있다(최남선, 『조선 상식』, 민속원, 1997.

대보름에는 부럼깨는 풍속처럼 질병을 예방한다는 의미로 귀밝이술을 마신다. 귀밝이술은 아침 식사 전에 데우지 않고 차게 해서 마시는 술인데, 이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진다고 믿는다. 귀가 밝아진다고 하여 명이주(明耳酒)라고도 하며, 『동국세시기』에서는 유롱주(牖聾酒), 중국 송나라의 『해록쇄사(海錄碎事)』에서는 치롱주(治聾酒)라고 하였는데, 조선 전기 문집에도 치롱주라고 하였다. 이날 이른 아침에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이름을 불러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내 더위 사가라.” 하며 더위를 판다(賣暑·賣熱·賣暍).215)더위를 파는 풍습은 중국 오나라 때 장쑤 성(江蘇省)과 저장 성(浙江省) 지역에서 입춘일에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의 이름을 불러 어리석음을 판 것(賣困)에서 유래한다(유만공, 『세시풍요』, 상원(上元) ; 『면암유고』 ; 『한양세시기』 ; 『해동죽지』). 이와 유사한 더위 파는 풍습은 대보름날 아침에 대나무쪽에 가족의 이름을 적어 동전을 종이에 싸서 길바닥에 버리면 누구든지 먼저 줍는 사람이 더위를 먹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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