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4장 명절 음식 , 그 넉넉함의 향연
  • 7. 잡귀를 물리치는 동지 팥죽
  • 동지의 음귀를 막아 주는 부적, 팥죽
이정기

동짓날 팥죽을 끓여 먹는 것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세시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하는, 7세기 초에 편찬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보면, 중국 요순시대에 형벌을 맡았던 공공씨(共工氏)의 재주도 없고 방탕한 아들 하나가 동짓날에 죽어 역귀(疫鬼)가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붉은 팥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동짓날 팥죽을 쑤어 역귀를 쫓았다고 한다. 또한 황제(黃帝)의 아들 누조(纍祖)가 길에서 죽어 역신(疫神)이 되었는데, 누조가 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팥죽을 이용해 역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 때문에 『면암집(勉庵集)』이나 『열양세시기』에서는 동짓날 팥죽을 쑤어 잡귀(雜鬼)를 물리친다는 풍속은 매우 황당하여 이치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원래 우리나라의 풍속도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 문집과 세시기에는 동짓날 대표적인 절식으로 단연 팥죽을 서술하고 있다.

『세시풍요』에 동지와 관련된 일곱 개의 칠언시 가운데 첫 번째 시에서는 동지에 먹는 팥죽과 이에 대한 유래를 간단한 설명을 곁들여 서술하고 있다.229)유만공, 『세시풍요』, 동지(冬至). 동지 팥죽의 붉은색은 양기가 시작되는, 그리고 태양이 부활하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색이다.

늙은 몸 돌아보게 하는 추운 날 붉은 팥죽 / 寒天荳粥憶蕪萎

둥글고 둥근 새알이 한 그릇에 가득하네 / 粉卵團團滿一盂

붉은 죽을 쑤어 문짝에 어지러이 뿌리니 / 門扇亂塗紅煮汁

공공씨의 아이 붉은 색을 두려워해서라네 / 共工兒怕血糢糊

(공공씨의 못된 자식이 이 날에 죽었기 때문에 피 대신 죽을 발라서 귀신을 쫓는다.) / (共工惡子死於時日 故代血塗粥以逐鬼)

팥죽은 기록에 ‘적두죽(赤豆粥)’, ‘소두죽(小豆粥)’, ‘두죽(豆粥)’, ‘두미(豆糜)’라고 하는데, 이는 팥죽의 묽고 된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로, 묽은 죽을 ‘죽(粥)’이라 하고 된 죽을 ‘미(糜)’라고 한다.230)한자의 뜻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면, 된 죽(糜)과 묽은 죽(粥)은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보통 자료에서는 미(糜)보다는 죽(粥)의 용례가 훨씬 많다. 물론 동짓날 팥죽은 먹기도 하지만, 문이나 장독대에 뿌리는 용도로 사용하기 때문에 묽은 죽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농가십이월속시」에서처럼 새알심을 넣어 만든 팥죽을 적두죽(赤豆粥)이라 하여 새알심을 넣은 묽은 죽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성현(成俔)은 『허백당보집(虛白堂補集)』 권2에서 동짓날 연유(酥) 같은 팥죽(豆粥)의 향기로움을 시로 읊었는데, 이때 연유 같다는 것은 하얀 찹쌀가루가 팥죽에 섞여 있는 것을 표현하였다고 생각하나 팥죽의 이름은 묽은 죽을 뜻하는 죽(粥)을 사용하고 있다. 좀 더 많은 자료의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미(糜)와 죽(粥)을 명확히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죽을 의미하는 글자(糜·粥) 앞에 적두(赤豆)나 그냥 두(豆)를 붙이는데, 모두 팥으로 쑨 죽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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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
동지 팥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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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팥죽에는 찹쌀로 새알 크기의 경단, 곧 새알심(鳥卵心)을 만들어 넣거나 찹쌀가루를 넣어 끓이는데, 찹쌀가루의 형태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된 죽(糜)에 넣은 것은 갈심(磨心)이라 하는데, 찹쌀을 갈아 팥죽에 함께 넣고 끓여 죽이 된 상태가 되도록 끓인 것이다. 묽은 죽(粥)에 넣은 것은 온심(全心, 옹심이)이라 하여, 찹쌀을 새알처럼 동그랗게 반죽하여 통째로 넣는 것이다. 새알심은 팥죽의 맛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해 꿀에 재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묽은 죽의 경우에는 팥죽을 먹을 때 쫄깃쫄깃한 새알심도 같이 먹게 되는데, 민간에서는 새알심을 나이 수대로 먹는다고 한 다. 죽을 먹으면 금세 배가 부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배가 고파지는데, 찹쌀로 빚은 새알심을 함께 먹으면 오랜 시간 배가 든든하다. 우리나라는 명절이나 잔치 때 떡이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동짓날에는 특별히 떡을 만드는 풍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새알심이 동짓날 떡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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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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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에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팥죽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사당에 올리기도 하고 이웃과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 그 냄새와 맛이 매우 좋아 이러한 풍속을 즐겨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붉은색을 띠는 팥이 벽사의 힘이 있다고 하여 동짓날 쑤는 팥죽은 사악한 기운을 씻어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잡귀를 쫓아 재앙을 면해 준다는 팥죽은 사람이 먹기 전에 사당에 먼저 올린 후 대문이나 장독대에 뿌려 두곤 하였다. 혹은 뿌리지 않고 각 방과 장독대, 우물, 창고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담아 놓는다.

팥을 대문이나 장독대에 뿌리는 것은 입춘날 대문에 크게 ‘입춘대길(立春大吉)’ 넉 자를 적어 놓는 것처럼, 잡귀를 물리치는 부적이나 굿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색이 붉은 팥은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231)최영년(崔永年), 『해동죽지(海東竹枝)』, 「살두죽(撒豆粥, 팥죽 뿌리기)」에 있는 칠언시에, “집집마다 쑤어 만든 향긋한 팥죽, 문에 뿌리며 부적과 굿을 대신하네, 오늘 아침 산귀신을 모조리 내쫓고, 양기 생기는 동지에 상서로움을 맞이하네”라고 읊고 있다. 요즘에도 이사하거나 개업했을 때 시루에 찐 팥떡으로 고사를 지내고 이웃에 돌리는 풍습이 있는데, 팥의 이러한 효과와 관련이 있다. 또한 옛사람들은 팥죽이 벽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오장(五臟)을 씻어 주고 혈기를 조절해 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팥죽에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잔병을 없애 건강해지고, 삶에서 액을 면하기를 기원하는 측면이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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