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5장 천년을 함께한 차
  • 1. 불교 문화와 차
  • 정성으로 올린 차 공양
김지원

불교에서는 불탑이나 불상을 예배하면서 향이나 꽃 그리고 음식 등을 바치는 관습이 일찍부터 있었다. 인도 초기 불교에서 신자들은 의복·음식·침구·탕약 등 출가자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를 승단(僧團)에 바쳤다. 나중에는 탑·사원·토지 등까지 공양물의 범위에 포함되어 승단 경제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관습을 공양(供養)이라 하는데, 부처를 존경하고 믿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양의 원어인 푸자(pūjā)의 본래 의미도 존경 또는 예배이다. 공양은 공양하는 물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있는데, 불교 대중 의례 중 제일 잘 알려진 육법 공양(六法供養)은 부처 또는 불법승(佛法僧)에게 향(香), 등(燈), 과일(果), 차(茶), 밥(米), 꽃(花)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공양물로 차를 올린 것은 깨끗한 물을 올렸던 일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인도의 리그베다(Rig Veda) 시대(BC 1500∼600) 바라문교에서 여러 신들을 받드는 제사 의식에 사용한 물을 알가(阿伽, Argha)라고 했다. 이후 불교가 일어난 뒤에도 물은 공양물로써 계속 올려졌다. 물은 누구나 올릴 수 있는 가장 평범한 공양물이지만, 갈증을 해소해 주고 더러움을 씻어 주는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물은 불법에 비유된다. 물이 갈증을 풀어 주듯 불법은 진리의 대한 갈증을 풀어 주고, 물이 신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듯 불법은 자기 마음의 욕심과 집착을 씻어 낸다. 하지만 물은 조금만 오염되어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한 잔의 맑은 물을 올리려면 많은 정성이 필요했다. 가장 소박하지만 가장 정성이 깃든 공양물인 것이다.

차는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다. 차의 전래와 발전은 모두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양물로 차가 자리 잡게 된 것은 차를 마시는 풍속이 오래 전부터 있었던 중국에서 불교 선 사상이 유행하면서부터였다. 불교의 중국화를 의미하는 선종은 당시 불교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었다. 차는 깨달 음을 얻고자 밤낮으로 좌선하는 수행승들에게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하여 수행에 도움을 주었다. 차가 가진 카페인의 효능은 잠을 깨우고 정신을 맑게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이 효능이 참선을 해야 했던 선종과 연결되면서 차는 더욱 유행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선종의 실질적인 형성을 가져온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일상적인 마음이 곧 도)와 즉심시불(卽心是佛, 내 마음이 바로 부처) 사상의 영향도 컸다. 마조 도일은 진리는 인간 본성에 따라 행해지는 일상생활 속에 있다고 했다. 선이라는 것을 특수한 불교적 실천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일상생활 자체를 의미하며 생활의 일부라고 했다. 실제로 많은 수행승들은 차를 마시는 것을 바로 참선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또, 차의 약리적 효과를 떠나 차를 끓이는 과정, 즉 맑은 물을 찾아 그 물을 떠다 화로에 올려 물을 끓이고 차를 다려 마음을 차분히 한 뒤 향과 맛을 음미하며 마시는 것이 참선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선승(禪僧) 조주 종심(趙州從諶, 778∼897)의 끽다거(喫茶去)라는 유명한 화두(話頭)가 있다. 어느 날 두 스님이 조주 선사를 찾아왔다. 한 사람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가 무엇입니까?” 하니, 조주 선사는 그 수행자에게 “이곳에 한 번 온 일이 있는가?” 하였다. “왔었습니다.” 하니, 조주 선사는 “그럼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 하였다. 다른 수행자가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니, 조주 선사는 그 수행자에게 “이곳에 한 번 온 일이 있는가?” 하였다. “온 적이 없습니다.” 하니, 조주 선사는 “그대도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 하였다. 두 수행자가 간 뒤, 옆에 있던 원주(院主) 스님이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어째서 이곳에 왔던 사람도 차나 마시고 가라 하시고, 온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차나 마시고 가라 하십니까?” 조주 선사는 “그대도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라고 하였다. 왔던 사람, 안 왔던 사람, 의심을 하는 사람 모두 같은 차를 마시지만 각자 느끼는 맛과 향기가 다르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함 일상 속에서 각자가 가진 마음에 따라 깨달음을 얻으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야말로 차와 선이 같은 경지임을 잘 보여 준다.

차 마시기가 사원 생활의 하나로 자리 잡으면서 불교 의례 속에도 반영되었다. 조주 선사의 제자 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는 사원에서 공동생활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사원·의식·직책 등의 제도를 정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제정한다. 하지만 백장 회해 선사가 만들었다고 하는 청규는 지금 온전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나중에 이를 기본으로 만든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를 보면 각종 사원 의식에서 차를 올리는 예, 다장(茶狀, 다례 초대장), 자리 배치 등이 잘 나와 있다. 예를 들면, 사원에서 국왕의 생일 불공과 축하식을 행할 때 “대종(大鐘)을 쳐서 승당에 대중을 모으고 전각에서 부처를 향하여 배열하여 선 뒤 주지가 차를 달여 올리고, 상수지사(上首知事)들이 차례대로 향을 사르고 예배를 올린다. 시자(侍者)가 좌구를 거두고 차를 달여 내는 것을 마친다.”233)『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 권1, 240면.라고 하였다. 또, 사원에서 왕이나 왕후의 제삿날에도 주지가 향을 사르고 차를 올렸다고 한다.234)『칙수백장청규』 권1, 242면. 사원에서 차를 올리는 일이 하나의 중요한 의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차는 맛뿐 아니라 차를 다리는 과정이 중요하다. 깨끗한 물로 정성껏 다린 차 한 잔의 공양은 그 어떤 공양물에 비할 수 없다. 차를 마시는 법이나 행차(行茶)는 더욱 엄격해지고 의례화되었으며, 좌선을 끝낸 뒤 차 마시는 일도 일상화되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일상생활이며 수행의 연장이었다.235)김명배, 「백장청규」의 다례 연구」, 『한국 차학회지』 제6권 제1호, 2000 ; 박동춘, 「한중일(韓中日) 선다(禪茶)의 비교-초의의 다도 사상을 중심으로-」, 『3일간의 동안거(冬安居)-선(禪)과 예술-』, 예술의 전당 서울 서예 박물관 한국 서예사 특별전 고승 유묵 전시 특강 논문집, 2005, 49쪽. 차는 그 효능에서 시작하였지만 손님 접대에서 예불 의식까지 불교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차의 전래와 발달은 불교와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의 차 공양 기록으로 볼 때 불교 의례의 한 부분으로 차가 알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는 차가 삼국시대에 들어온 이래 왕실, 귀족, 승려들을 중심으로 차를 마셨던 것으로 보인다.236)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러 가지다. 일반적으로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구체적 시기에 대해서는 수로왕비 허왕후에 의해 아유타국에서 차가 전래되었다고 보는 설(이능화, 『조선 불교 통사(朝鮮佛敎通史)』, 경희 출판사, 1918)과 선덕왕 때 차는 있었지만, 흥덕왕(826∼836) 때 중국에 다녀온 대렴(大廉)이 차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설(『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3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부처에게 차를 올리는 공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신라 문 무왕(재위 661∼681)이 수로왕의 17대손 갱세 급간(賡世級干)에게 매년 명절마다 술과 단술·떡·밥·차 등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7세기인 문무왕 때에 이미 제사에서 차를 쓴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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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사 미륵삼존상
생의사 미륵삼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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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의례에서 차를 올린 기록은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대에 나타난다. 765년(경덕왕 24) 왕이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를 올리고 오는 충담사를 만나는 이야기가 있다. 왕이 충담사에게 미륵에게 올렸던 차를 자신에게도 줄 것을 부탁하자, 충담사가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맛이 다르고, 향기가 그윽했다고 한다.237)『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충담사는 3월 3일과 9월 9일마다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올린다고 했다. 8세기에 이미 부처에게 차 공양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에 충담사만 부처에게 차를 올리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승려나 신도들도 차 공양을 했을 것이며, 차 공양을 몰랐던 사람들은 충담사의 차 공양을 보고 곧 따라 배웠을 것이다.

한편, 경덕왕이 충담사가 끓여준 차 맛이 다름을 알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경덕왕 역시 차를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나기 전인 760년(경덕왕 19)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사라지지 않자 왕의 요청으로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바치자 해가 사라졌던 일이 있었다. 이때 경덕왕은 월명사에게 좋은 차(品茶一襲)238)‘품차일습(品茶一襲)’의 해석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좋은 차 한 봉’이라는 견해와 ‘좋은 차와 차를 달이는 다구 한 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와 수정 염주(水精念珠) 108개를 하사하였다.239)『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 왕은 차가 귀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수정 염주와 같이 선물로 하사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에는 차 공양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태자가 오대산에 들어가 골짜기 물을 길어다 차를 달여 문수보살을 비롯한 5만 진신(眞身)에게 공양한 일, 정신(淨神)이 오대산 신성굴에서 50년간 도를 닦았더니 정거천(淨居天)의 무리가 차를 달여 바친 일240)『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등은 모두 차 공양에 관한 기록이다.

사신이나 상인, 입당유학생(入唐留學生), 입당구법승(入唐求法僧)들을 통해서 중국의 차 문화는 꾸준히 들어왔고, 특히 8∼9세기를 지나면서 신라 불교 문화의 발달, 선종의 도입과 영향은 본격적인 차 문화를 전개시켰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차는 좌선하는 수행승들에게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하여 수행에 도움을 주었다. 중국에서 선종을 배워 온 승려들은 차도 같이 배웠고 귀국 후에 선종과 함께 차 문화도 널리 알렸다.

마조 도일의 선맥을 이은 신감(神鑑) 선사에게 유학했던 진감 국사 혜소(眞鑑國師慧昭, 774∼850)는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옥천사(오늘날의 쌍계사)를 창건한다. 혜소는 당나라에서 27년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차 생활을 했을 것이다. 최치원(崔致遠, 857∼?)이 887년에 지은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에 혜소와 관련된 차 이야기가 남아 있다.

한명(漢茗)을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石釜)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241)『역주 한국 고대 금석문(譯註韓國古代金石文)』 Ⅲ,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 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1992.

비문 속의 ‘한명’은 중국차이다. 덩어리로 된 단차(團茶)로 가루를 내서 다유(茶乳)로 마시는 차로 추측된다. 혜소는 중국 유학 시절 차를 접하면서 차 마시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차를 돌솥에 넣어 끓여 마셨다. 차를 맷돌로 갈아 가루를 내서 물에 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방법이 번거롭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 그는 “차 맛을 알 수 없고 배를 적실 뿐이다.”라고 말하며 맛에 탐닉하는 속(俗)을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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