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5장 천년을 함께한 차
  • 2. 일상 속에 들어온 차
  • 고려의 차와 다점
김지원

고려인들에게 ‘차 한 잔’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임박(林樸, ?∼1376)이 제주도 선무사(宣撫使)가 되었는데 ‘비록 차 한 잔이라도 백성의 것은 입에 대지 않았다’ 하여 백성들이 성인이 왔다며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254)『고려사』 권111, 열전 24, 임업(林樸). 차 마시는 일은 일상생활 속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간단한 대접이었다. 고려인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던 차 마시는 풍속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고려인들은 어떤 차를 마셨을까? 『고려사』나 고려 문인들의 문집에 나오는 차를 보면 크게 고려 토산차와 중국차로 나눠진다. 고려 토산차로는 뇌원차·대차 등이 있었고, 중국차로는 용봉차(龍鳳茶)·건계명(建溪茗)·납차(蠟茶)·증갱차(曾坑茶) 등이 있었다.

뇌원차는 아주 이른 봄 차의 움싹을 따서 찐 후 찧어 덩어리로 만든 고급 차로 가루를 내어 다유로 마셨다. 뇌원차는 1038년(정종 4) 거란에 예물 로 보냈으며,255)『고려사』 권6, 세가6, 정종 무인 4년. 최량, 최승로 등이 죽었을 때 부의품(賻儀品)으로 하사되었다.256)『고려사』 권93, 열전6, 최승로(崔承老) ; 『고려사』 권93, 열전6, 최량(崔亮). 국가 간의 예물로 쓰이고 왕이 내리는 부의품으로 쓰인 것으로 볼 때 당시 고려의 가장 고급 차였던 듯하다. 대차는 뇌원차 움싹보다 좀 더 자란 잎으로 만들었는데, 왕이 신하의 부의품으로 하사하기도 하였다.

중국차 중에서 가장 유명했던 것은 용봉차였다. 차 덩어리 겉에 용과 봉의 무늬를 찍은 것으로 1078년(문종 32) 송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예물 중에도 들어 있었다. 당시 중국 최고의 차로 예종 때는 송나라에서 선사품으로 보낸 용봉차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257)『고려사』 권13, 세가13, 예종2, 예종 임진 7년. 서긍이 “오직 중국의 납차와 용봉차를 귀히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이 가져다 판다.”라고 한 것으로 볼 때, 고려 귀족층들 사이에서 하사품 외에도 개인적으로 구해 마실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차였음을 알 수 있다.

차는 온도와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포장도 중요하다. 고려시대 차의 포장은 일반적으로 상자에 담아 비단으로 싼 뒤 실이나 끈으로 묶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규보의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맑은 향기 미리 새어날까 두려워하여

옥색 비단으로 굳게 감싼 상자를 자줏빛 머루덩굴로 얽어매었네258)김명배, 『한국의 다시 감상』, 대광 문화사, 1999, 39쪽.

1078년 송나라에서 문종에게 보낸 용봉차는 10근이었는데, 금은으로 도금한 대나무무늬 상자에 한 근씩 넣어 비단으로 싸서, 아름다운 꽃판 장식이 달린 붉은 칠을 한 상자에 담아 다시 붉은 꽃무늬를 놓은 비단 겹보로 각각 쌌다.259)『고려사』 권9, 세가9, 문종3, 문종 무오 32년. 차의 포장은 차를 좋게 보존하는 데도 목적이 있지만, 귀한 선물인 만큼 정성을 다해 화려하게 꾸몄다.

고려인들은 차를 다유와 다탕(茶湯)의 형태로 달여 마셨다. 다유는 오늘날 일본차에서 유래된 말차(抹茶, 가루차) 마시는 법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사실은 송나라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고려시대에 차를 마시는 가장 일 반적인 방법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급 덩이차나 잎차를 곱게 갈아 체로 쳐서 만든 가루를 사발에 점다(點茶, 물을 먼저 끓인 뒤 찻가루를 넣어 휘저어 마시는 방법)하여 거품을 일으켜 마시는 탁한 차를 말한다. 미세한 찻가루를 마시기 때문에 우려내 마시는 잎차보다 엽록소를 더 많이 섭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음다법이기도 하다. 맷돌에서 갈아낸 찻가루와 탕관(湯罐, 물을 끓이는 솥 또는 주전자)에서 끓인 물을 사발에 넣고 찻숟가락(茶匙)이나 찻솔(茶筅)로 휘저으면 거품이 형성된다. 고려시대 문집에는 다유를 운유(雲乳), 백유(百乳), 설유(雪乳), 유화(乳花) 등으로 묘사하여 그 빛깔을 젖이나 눈 같은 흰색으로 표현하였다. 차의 거품이 흰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맛은 부드럽고 향은 그윽하며 색은 아름다운 연두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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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완에 담긴 다유
다완에 담긴 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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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차를 만들려면 차를 차맷돌로 갈아야 한다.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승원다마(僧院茶磨, 절의 차갈이)」라는 시를 통하여 차맷돌로 가루차를 만드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이 바퀴를 주관하지 않으니 개미 걸음처럼 더디고

달도끼(月斧) 비로소 휘두르니 옥가루 날리네

불가(佛家)의 놀이에는 예로부터 진실됨이 있으니

맑은 하늘에 우렛소리, 눈이 펄펄 내리네260)김명배, 앞의 책, 103쪽.

차맷돌을 빨리 돌리면 마찰열 때문에 차의 품질이 손상되므로 시에 나오듯 ‘개미 걸음’처럼 천천히 돌려야 한다. 성종이 국가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공덕재를 베풀면서, 부처에게 올리기 위해 차를 직접 차맷돌에 갈자, 최승로는 이 일이 왕의 몸에 무리가 된다고 못하도록 상소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그만큼 차를 차맷돌에 가는 것은 힘들고 정성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루를 내어 다유로 마시는 차는 고급차로 주로 궁중에서 사용되어 국가 의례 때 사용되거나, 국가 간의 예물, 신하에게 내리는 선물로 썼고, 왕실, 귀족, 승려, 문인들이 주로 마실 수 있었다.

다탕은 거친 떡차(餠茶)나 잎차를 끓여 걸러낸 맑은 찻물이다.261)다탕을 차가 아닌 인삼차 같은 대용차로 보기도 한다. 물에 약재나 감초 등을 넣고 끓여 따뜻하게 혹은 차게 마셨다. 서긍이 관사에 머물 때 세 차례 차가 나오고 뒤이어 나왔다는 탕이 다탕으로 추측된다. 다탕은 궁중에서도 마셨지만 다유에 비해 끓이기도 간편하고, 적은 양의 차로 많은 사람들이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간편하게 마실 수 있었다.

평상에 비스듬히 누워 문득 나를 잊어 버렸네

베갯머리에 바람 불어와 낮잠 절로 깨어나네

꿈속에서도 이 몸은 머물 데가 없었네

하늘과 땅이 모두 한 채의 큰 정(亭, 머물렀다 가는 곳)이니

빈 누각에서 꿈을 깨니 해는 지려고 하는데

흐릿한 두 눈으로 먼 산봉우리를 바라본다

누가 알까 숨어 사는 사람의 한가한 멋을

봄에 자는 잠은 고관이 받는 봉급과 맞먹는다262)『동문선』 권19, 「다점주수(茶店晝睡)」.

고려 인종 때의 문인 임춘(林椿)이 지은 「다점주수(茶店晝睡, 다점에서 낮잠을 자다가)」 라는 제목의 시이다. 임춘은 글재주가 있었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방황하다 결국 굶주림으로 30대 후반에 요절하였다.263)『고려사』 권102, 열전15, 이인로(李仁老). 그가 낮잠을 즐길 정도로 편안함을 느꼈던 다점은 어떤 곳이었을까?

고려시대에는 오늘날의 찻집과 같은 형태의 다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다점에서 돈이나 베를 주고 차를 사먹었다.264)『고려사』 권79, 지33, 식화(食貨)2, 화폐(貨幣).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의 상소문을 보니, 돈을 사용하게 하고, 베를 쓰는 것은 금지하여 백성들을 놀래게 하여 이것은 나라에 이익을 주지 못하고 백성들의 원망만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 차와 술이며 음식 등을 파는 각종 상점들에서 교역하는 데는 이전과 같이 돈을 쓰게 하고 그 이외에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서로 교역하는 데는 토산물을 쓰도록 할 것이다.” 귀족층 이외에 여유가 되는 일반민들도 다점에서 차를 마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비싸고 좋은 차는 마실 수 없어도 다탕이나 기타 약재를 넣은 대용차 정도는 마실 수 있었다. 물 론 귀족들이 주로 드나드는 다점은 좋은 건물에 용봉차 같은 고급 중국차나 좋은 다구를 구비해 놓았을 것이다. 또, 시 속에서 임춘이 누각(樓閣, 1층 이상의 건물)에서 편하게 낮잠을 잤다고 표현한 것을 볼 때, 다점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건물 양식으로 바람이 잘 통하는 누각의 형태로 지어졌고, 낮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휴식 공간이었던 것 같다

다점 외에 왕, 승려, 귀족, 부호 등 상류층을 위한 다정(茶亭)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종이 현화사(玄化寺)에 갔을 때 승려들이 모두 다정을 차려 놓고 왕을 청하는데 서로 앞을 다투어 가면서 더 화려하고 더 사치스럽게 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265)『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2, 의종 기묘 13년. 서긍도 향림정(香林亭)에 가게 되었는데 정사(正使)나 부사(副使)가 여가 있는 날에는 언제나 향림정에서 관속들에게 차를 끓이게 하고 바둑을 두며 하루 종일 담소하는데, 이것이 마음과 눈을 유쾌하게 하고 무더위를 물리치는 방편이라고 하였다.266)『고려도경』 제27권, 관사(館舍) 향림정(香林亭). 상류층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차 마시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다점, 다정의 존재와 집 외의 공간에서도 차를 찾아 즐겼다는 것은 고려시대의 차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기호 음료였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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