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0권 자연과 정성의 산물, 우리 음식
  • 제5장 천년을 함께한 차
  • 3. 유교 문화와 차
  • 왕실 다례
김지원

조선 왕실에서는 고려 왕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례 중에 다례를 행하였다. 고려시대의 진다 의식은 조선시대에는 다례(茶禮)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의례 중에 다례를 행한 것은 주로 사신을 맞이할 때였다. 다례는 중국의 사신이 서울까지 오는 중에도 이루어졌고, 궁에서 사신을 맞이할 때도 행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 왕조 실록』을 보면 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봉선전·선원전 등에서 탄신일이나 삭망일(朔望日,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제사 지낼 때, 왕과 왕후의 기제사나 묘제사 혹은 주다례(晝茶禮) 때 제사 형식으로 다례를 하였다. 주다례란 왕이나 왕비의 장례 후 3년 안에 혼전(魂殿, 왕이나 왕비의 국장 뒤 종묘에 배위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사당)과 능소(陵所, 왕이나 왕비의 능)에서 낮에 드리는 제사인데, 차와 간단한 음식으로 정오에 지내며 주로 다탕(茶湯)을 올렸다. 또, 금주령이 내려져 의례 중에 술을 사용할 수 없을 때에도 차를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궁중 연회에서도 차를 사용하였다. 1829(순조 29)년 기축년(己丑年)에 있었던 궁중 연회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 연회는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0년이 되는 해이면서 동시에 만 40세가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효명 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발의하여 열렸다. 이 연회가 열린 해가 기축년이라 이를 ‘기축년 진찬(己丑年進饌)’이라고 부른다. 18세 때인 1827년(순조 27)부터 대리청정을 한 효명 세자는 바로 그 해부터 1829년까지 해마다 궁중에서 커다란 잔치를 열었다.

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 등은 왕이나 왕비·왕대비의 생신, 존호(尊號), 기로소(耆老所) 입사 등을 기념하기 위한 궁중의 연회를 의미한다. 생신은 일반적인 생신이 아니라 망오(望五)·육순(六旬)·칠순(七旬) 등 특별한 생신을 가리키며, 이때에는 다른 생신과 달리 대규모의 진연 또는 진찬, 진작 행사를 거행하였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 진연이고, 진찬은 진연에 비해 절차와 의식이 간단하다. 진찬은 다시 내진찬(內進饌)과 외진찬(外進饌)이 있는데, 내진찬은 왕·왕비·대왕대비 등과 종친들이 주로 참석하여 열렸고, 외진찬은 문무백관들이 참석하여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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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진찬도병 중 자경전내진찬
기축년진찬도병 중 자경전내진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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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 진찬은 준비, 진행 등의 과정을 기록한 『조선 왕조 실록』과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기축년진찬도병(己丑進饌圖屛)에 당시 연회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음력 2월 9일 창경 궁의 명정전(明政殿)에서 외진찬을 개최한 뒤, 음력 2월 12일 순조의 비이자 왕세자의 어머니인 순원 왕후가 기거하는 자경전에서 내진찬을 개최하였다. 내진찬은 여성과 관련된 행사였기에 의식 중에 다례 의식을 행하였다. 기축년진찬도병 중 자경전내진찬도(慈慶殿內進饌圖)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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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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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마당에는 차양을 쳤다. 내전에서 행하는 의식인 만큼 연회의 주인공인 순조와 주관자인 왕세자를 제외한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행사였다. 그래서 의식 진행에 빼놓을 수 없던 종친(宗親), 척신(戚臣), 악공(樂工) 등의 남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주렴(朱簾)과 홍주갑장(紅紬甲帳)을 설치하였다. 즉 긴 천을 커튼 모양으로 걷어 올린 홍주갑장 안에 주렴을 처마 부근까지 올려 장식하였다. 자경전 중앙 북쪽 벽에서 남향으로 주인공인 순조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어좌(御座) 뒤에는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풍(日月五峯屛風, 해, 달, 다섯 봉우리, 소나무 등이 그려진 병풍)이 있다. 자경전 내진찬을 위해 227냥 1전을 들여 10첩 대병풍으로 새로 만들었다. 어좌 앞 큰 상에는 음식을 가득 차렸다. 진찬에 차린 음식은 127종에 이른다.

왕세자의 자리는 주렴 밖의 동쪽 계단 위에 동쪽에 가깝게 서향으로 두고, 왕세자빈의 자리는 전 안의 서쪽에 가깝게 동향으로 두어 중앙 왕의 자리를 중심으로 상호 대칭적인 관계를 이루도록 하였다. 좌·우명부(左·右 命婦)의 자리도 주렴 안 서쪽 계단 위에 동향으로 설치하였다. 종친·척신의 자리는 자경문 밖 남쪽 계단에 동서로 나누어 북향으로 설치하였다.

자경전내진찬도에는 차를 마시는 장면은 아니지만 차를 준비해 놓은 상이 있다. 자경전 대청 안 오른쪽 중간 부분 상 위에 은다관(銀茶罐, 은주전자)과 은찻종(銀茶鐘, 은찻잔)이 놓여 있다. 이를 다정(茶亭)이라고 하는데, 왕에게 차를 올리기 위해 준비한 상이다. 그림에 보이는 다정은 붉은 천을 씌운 사각상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는 화려한 조각에 붉은 칠을 한 아가상(阿架床)을 사용하였다. 그 위 주정(酒亭)과 같은 모양이다. 세자와 세자빈을 위한 다정도 각각의 위치에 따로 꾸며졌는데, 검은 칠을 한 아가상이 사용된 점만 다르고 같은 다구를 차렸다. 다정 옆에서 차를 올리는 상궁들은 녹원삼에 남치마를 입고 큰머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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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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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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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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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내진찬은 왕세자, 왕세자빈, 좌·우명부의 반수, 종친 등이 왕에게 술을 일곱 차례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술과 함께 간단한 안주도 올린다. 이때 차도 올리는데, 차를 은찻종에 따라 붉은 칠한 둥근 상에 받쳐 올린다. 왕세자와 왕세자빈 등은 왕에게 올리는 술과 탕, 차를 직접 올리지 않는다. 절차에 따라 정해진 위치에서 배(拜)만 할 뿐 나머지는 여집사, 여관 등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주었다. 이날 올린 차는 작설차(雀舌茶)였다. 조선시대에는 작설차가 유행하였다. 작설차는 원래 차의 어린잎을 따서 만든 것으로, 모양이 참새의 혀와 같다 하여 작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린잎으로 만들기 때문에 쓴맛이 없고 향이 좋고, 우려낸 찻물의 색도 맑다. 진찬에 올랐던 음식 중에서 차와 어울리는 것은 떡, 유밀과, 강정, 다식 등이다. 그중 다식이 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데, 기축 년 진찬에 마련된 다식은 녹말다식·각색다식·흑임자다식·송화다식·황률다식이었다.271)이상의 의례 절차는 국립 국악원, 『한국 음악학 자료 총서』 권3, 1980에 영인된 순조 기축년 『진찬의궤』를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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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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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 연회에서 고려시대만큼 차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왕실에서는 불교 의례의 영향으로 차, 술, 과일, 꽃 등을 차례대로 올렸지만, 조선 왕실에서는 술을 더 자주 썼고, 차를 사용하더라도 순서로 보면 뒷부분에 있어 진다 의식은 형태정도만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차는 식후 마시는 음료 정도로, 건강을 위한 약의 의미로, 그리고 긴 연회 끝에 피곤함을 풀어 주는 목적으로 올렸던 듯하다.

다례는 사대부들에게도 전해졌다. 이들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고 주희(朱熹)의 『주자가례(朱子家禮)』 의례를 받아들여 사대부의 생활 전반에 『주자가례』가 반영되었다. 주희는 불교 선종의 헌다식(獻茶式)을 채용하여 선조를 제사 지낼 때의 헌다식을 만들었다. 사대부들은 유교식 상·제례(喪·祭禮)의 기준을 『주자가례』에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례도 받아들였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지은 예서(禮書) 『가례집람(家禮輯覽)』에는 삭망차례(朔望茶禮,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차례) 때 신주 오른쪽에는 술을, 왼쪽에는 차를 올린다고 하였다. 김장생이 직접 그린 제기도(祭器圖)에는 찻잔과 차탁(茶托), 찻솔(茶筅)이 나온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 제의초(祭儀抄) 시제의(時祭儀, 춘분·하지·추분·동지에 올리는 제례)에는 “주인과 주부가 차를 올 린다.”라고 하였다. 또, 돌아가신 날에 지내는 기제의(忌祭儀)에서는 “음식을 권한 후에 문을 닫은 다음 문을 열고 차를 올리고 신을 보낸다.”라고 하였다.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가 지은 예서 『사례편람(四禮便覽)』에는 기제사 때 주부가 점다(點茶)하여 찻병을 들고 아들에게 명하여 신위(神位) 앞의 빈 잔에 차를 따른다고 하였다.

여러 예서에서 제사에 차를 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차를 쓰지 않고 술, 물 또는 탕(湯)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차가 귀해서 일부 사대부만 제사에 차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제사에서 차는 용어나 형식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차가 귀해지고, 의례에서 차의 사용이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성리학이 조선시대의 정치 이념이 되면서 공식적인 의식에서 불교적 성격이 강한 차와 관련된 의례는 점차 술의 사용과 유교적인 의례로 대체되었다.

둘째, 조선시대 차의 공급은 주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의 생산지에서 공다(貢茶)에 의해 궁중으로 들어왔는데, 공다에 대한 과중한 부담으로 해당 지역 백성들이 차 재배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점필재집(佔畢齊集)』에는 그가 함양(咸陽) 군수로 갔을 때 차 농사를 짓지 않는 백성들이 다세 때문에 전라도까지 가서 차를 구입해 세금을 내는 어려움을 보고 대밭 속에서 야생 차나무를 발견하여 차밭을 만들어 세금을 내도록 한 일이 나온다. 당시에는 쌀 한 말로 차 한 홉을 얻을 정도로 차가 비쌌다. 이런 폐단이 함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목이 쓴 「다부」 글머리에도 “차는 세금을 내어야 하니 도리어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는데도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가.”라고 공다의 폐해를 기록하고 있어 백성들이 차 재배를 기피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와 『여지도서(輿地圖書)』(1770)에서 차가 진공되는 산지를 비교해 보면 차 산지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을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작설차 산지가 22개소(경남 8개소, 전북 5개소, 전남 9개소)였는데, 『여지도서』에서는 9개소(경남 2개소, 전북 1개소, 전남 6개소)로 줄어들고 진공은 7개소에서 하고 있다. 후기로 가면서 작설차 생산이 줄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차 산지였던 함양·부안·정읍·영암·구례 등 다섯 곳은 『세종실록지리지』 이후 차 관련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된 까닭은 공다의 폐해에서 벗어나고자 차나무를 없애버렸거나 차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되는 등의 여러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272)이현숙, 「조선시대 차 산지 연구」, 『한국 차학회지』 9-2, 2003, 23∼38쪽.

차의 재배와 생산이 줄었지만, 조선시대 음다 풍속이 쇠퇴하거나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선비들과 승려들 사이에 차 생활이 이어졌고,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차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선비들이 차를 즐겨 마시면서 수요는 점차 늘어났지만 당시에 차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비싼 중국차를 구입하든지 아니면 차를 아는 승려와의 교분을 통해서만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선비들에게 차는 더 이상 단순한 음료의 의미가 아니었다. 선비들에게 차의 의미는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이상 세계 속의 음료이고, 이상 세계로 건너가기 위한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차를 즐겼던 이유가 군자가 되기 위한 수양의 방편으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만큼 더 차에 의미를 두었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어 선비들과 승려들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이들을 통해 차를 얻기도 하고, 차 생산 자체도 조금씩 늘긴 했지만, 여전히 차는 구하기 어려웠다.

차가 귀했던 만큼 차를 다유보다는 주로 다탕으로 마셨던 것 같다. 다탕은 떡차나 잎차를 끓여 마시는 방법이다. 떡차는 이른 봄의 찻잎이 아니라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생산이 가능하였다. 또, 운반과 보관이 쉽고, 부수거나 그냥 그대로 물에 넣어 끓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소박함과 간편함을 좋아한 선비들이 마시기 좋았다.

차를 구할 수가 없을 때는 대용차를 마셨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다품(茶品)으로 매화차, 포도차 매실차, 국화차 등이 나온다. 정확하게 말하면 차가 아니라 탕이다. 오늘날 흔히 마시는 인삼차, 생강차, 모과차 등은 모두 인삼탕, 생강탕, 모과탕으로 엄밀히 말하면 차라고 볼 수 없다. 차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각종 약재를 넣고 끓인 탕으로 차를 대신하고, 끝에 ‘차’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규합총서』에는 차와 관련된 풍속도 기록되어 있다. 단옷날 오시(午時, 낮 11시∼13시)에 붉은 물감으로 차(茶) 자를 쓴 부적을 지니고 다니면 뱀과 지네를 쫓을 수 있으며, 입춘날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같이 신다울루(神茶鬱壘) 네 글자를 써서 문에 붙이면 신다와 울루라는 두 호법 신장(護法神將)이 대문의 양쪽에 지켜 서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나쁜 귀신을 쫓는다고 하였다. 또, 묵은 차를 사르면 파리가 없다고 하였다. 실제 차에는 해열, 해독의 효능이 있어서 약으로도 썼다. 고려시대에도 백성들에게 약의 의미로 차를 하사하였고, 『조선 왕조 실록』에는 왕에게 차를 약으로 지어 올린 기록도 나온다. 사람들은 차의 효능을 알았기 때문에 약으로써 차를 구해 마실 수는 없어도 차 글자를 쓴 부적으로 병과 같은 액운을 막으려고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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