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이 차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전라남도 강진에서였다. 그는 1789년(정조 13) 천주교(西敎)를 믿는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충청남도 해미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강진으로 이배(移配)된다. 그 전부터 차를 접했 겠지만, 강진에서 차와 관련된 시와 글을 대부분 썼기 때문에 본격적인 차 생활은 강진 유배 시절부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약용은 그곳에서 아암 혜장(兒庵惠藏, 1772∼1811) 선사를 만나 차 생활에 푹 빠지게 된다. 유배 생활에서 차는 그의 지친 몸과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는 좋은 약이 되었다. 1808년 봄에 정약용은 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 1744∼1821)의 별장인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차 생활을 즐겼다.
정약용의 차 생활은 다시집(茶詩集)인 『다암시첩(茶盦詩帖)』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초당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서 못 안에 석가산(石假山)을 쌓고, 샘물 약천(藥泉)을 고치고, 돌을 구해 다조(茶竈, 차 화덕)를 만들었다. 자연 속의 다실을 만든 것이다. 약천의 물을 떠서 다조에서 물을 끓여 평석 위에 올리고 차를 즐겼는데, 주변 풍경에 많은 애정을 가졌던 듯 석가산, 약천, 다조 등에 대해 시를 남겼다.
정약용은 다시뿐 아니라 차나무 재배법, 차 무역에 대한 견해도 글로 남겼다.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우리 차나무를 재배하고 잘 관리하여 중국의 말과 바꾸어 나라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다마 무역(茶馬貿易)을 제안하였고, 「각다고(榷茶考)」를 통해 중국 당·송·명대의 차세(茶稅)와 전매(專賣) 제도를 정리하기도 하였다.273)『경제유표(經世遺表)』 권2, 동관공조(冬官工曹) 제6, 임형사(林衡寺) ; 『경세유표』 권11, 제5집 정법집(政法集) 제11, 지관수제부공(地官修制賦貢) 제5 각다고(榷茶考).
흉년이 들어 차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정약용은 혜장 선사에게 차를 구걸하는 「걸명소(乞茗疏)」라는 글을 지어 보냈다. 소(疏)는 왕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인데, 차를 구하는 마음이 그만큼 간절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제목에 ‘소’ 자를 붙인 것이다.
나는 요즘 차만 탐식하는 사람이 되어 차를 약처럼 마십니다. …… 산에서 나무하다 생긴 병이 있으니 차를 얻고자 하는 뜻을 전합니다. 듣건대, 고해(苦海)를 건너는 데는 보시를 가장 중히 여긴다는데 명산의 이름난 산의 고액(膏液)이며 풀 중의 영약으로 으뜸인 차는 그 제일이 아니겠습니까. 목마르게 바라는 뜻을 헤아려 은혜를 아끼지 말기 바랍니다.274)김대성 엮음, 『동다송(東茶頌)』, 동아일보사, 2004, 354∼356쪽 재인용.
혜장 선사는 정약용에게 초의를 소개해 준다. 당시 23세였던 초의는 48세인 정약용에게 유학과 차를 배우게 된다.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정약용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동다기(東茶記)』의 한 구절을 초의는 『동다송』에서 인용하였다. “『동다기』에 이르기를 ‘어떤 이는 우리나라 차의 효능이 중국 월주(越州)에서 생산된 차보다 못하다.’고 의심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색, 향, 기(氣), 미(味)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서(茶書)에 육안차(陸安茶)는 맛이 뛰어나고 몽산차(蒙山茶)는 약효가 높다 하는데, 우리나라 차(東茶)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다.” 우리 차에 대해 자긍심을 가졌던 정약용은 우리 차와 중국차를 비교한 뒤 우리 차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1818년(순조 18) 유배가 풀려 강진을 떠나게 되자 정약용은 그곳에 있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회(茶會)이다. 다신계의 취지나 규약은 다산과 제자 18명이 쓴 「다신계절목(茶信契節目)」에 나온다. 그들은 사람이 귀한 것은 신의가 있기 때문인데, 함께 지내며 즐거워하다가 헤어진 뒤에 서로를 잊는다면 그것은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고, 신의를 잊지 않기 위해 다신계를 맺는다고 하였다. 사람마다 돈 1냥을 2년 동안 낸 것에 이자가 생겨 35냥이 되자 정약용이 밭을 사 다신계의 계물(契物)로 만들었다. 이들은 매년 청명·한식 때 모여 출제된 운(韻)에 맞춰 지은 시를 적어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丁學淵)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또, 곡우 때 어린 차를 따서 은근한 불에 말 려 잎차 한 근을 만들고, 입하 전에 늦차를 따서 떡차 두 근을 만들어 잎차 한 근과 떡차 두 근을 시찰(詩札, 시로 쓴 편지)과 함께 부치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차 따기의 부역이나 다신계 논밭의 관리에 대한 내용도 밝혀 두었다.
정약용은 차를 마시며 함께 공부했던 제자들과 다신계를 통해 앞으로도 계속 차향처럼 맑고 깊은 인연을 이어 나가고자 한 것이다. 물론 강진 지역의 차를 좋아했던 그가 강진을 떠난 뒤에도 계속 차를 구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이들의 모임이 하나의 학파로 뚜렷하게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호남 지역의 학문과 차 문화의 발전에 기틀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약용의 차 지식은 초의에게 전해진다. 초의는 대흥사 일지암(一枝庵)을 중심으로 40여 년 동안 선 수행과 차 생활을 하였으며, 직접 차밭을 일구며 차를 만들면서 『다신전(茶神傳)』과 『동다송』을 저술하여 이론적·실질적 면에서 우리 차에 대한 전반적인 정리를 하였다.
『다신전』은 차 생활에 필요한 지침서였다. 초의의 완전한 창작이 아니고 청나라 학자 모환문(毛煥文)이 엮은 『만보전서(萬寶全書)』라는 백과사전 중 「다경채요(茶經採要)」를 정리하여 정서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22개의 항목에 걸쳐 찻잎의 채취와 제작법, 품질 식별법, 물 끓이는 법, 다구 등을 소개하고 있다.
1837년(헌종 3) 52세 때, 초의는 우리 차의 역사와 가치를 한시로 노래한 『동다송』을 저술한다. 동다송이란 우리나라 동국(東國)에서 생산되는 차를 찬송하여 게송(偈頌)으로 지었다는 뜻인데, 모두 31연 62구로 되어 있다. 사실 이전에도 차에 관한 저술은 있었으나 중국차나 중국 다서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들이어서 『동다송』에 와서야 우리 차에 대한 견해와 차 문화가 체계화된 셈이다. 내용을 보면 차에 얽힌 전설과 차의 효능, 생산지에 따른 차 이름과 품질, 차 제조법, 물에 대한 평, 차 끓이는 법, 차 마시는 구체적인 방법 따위를 다루었다. 그리고 각 송마다 옛사람들의 여러 문헌을 인용하고, 상세하게 주석을 달아 고증하였다.
초의는 『동다송』에서 자신의 차 생활과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는 차를 소박하고 편안하게 즐겼으나 좋은 차와 좋은 물, 그리고 중정(中正)을 잃지 않은 차를 원했다.
그 가운데 있는 현미함은 묘하여 말하기 어려우니 참다운 정기는 물과 차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 물과 차가 잘 어우러진다 해도 중정을 잃을까 두려우니 중정을 잃지 말아야 차신(茶神)과 수령(水靈)이 아우러진다.275)『동다송(東茶頌)』, 제29송.
이 글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큰 뜻은 좋은 차 한 잔을 만들기 위해서는 차와 물이 잘 어울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좋은 물에 좋은 차를 넣어 우린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중정을 잃으면 안 된다. 중(中)은 ‘알맞다, 적당하다’는 뜻이고, 정(正)은 ‘바르다’는 의미이니 중정은 바르고 알맞은 것을 말한다.276)김대성 엮음, 앞의 책, 188∼191쪽. 알맞게 끓인 물, 물의 양, 차의 양, 차를 우리는 시간 모든 것이 모자라거나 지나치면 안 된다. 이렇게 중정을 잃지 말아야 차와 물이 어우러진다는 뜻이다. 중정을 잃지 않고 정성을 다해 끓인 차를 마시면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일고 몸은 가벼워 하늘을 거닐게 된다.”277)『동다송』, 제16송.고 하였다.
차는 간단히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는 재배하고 만드는 것도 어렵고, 끓이는 과정도 까다롭다. 마음을 집중해야 하고 집착도 버려야 한다. 지나쳐서도 모자라서도 안 된다. 이 과정은 선 수행과 비슷하다. 초의에게 차와 선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평범한 일상생활의 하나이자 선 수행으로 차 생활을 하였다. 차를 마시며 차의 맛을 깨닫는 것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는 “깊이 길러 가볍고 연한 물을 한번 맛보면 참되고 정갈하고 조화로워 몸과 마음이 열린다.”라고 하였다.278)초의(艸衣), 『초의시고(艸衣詩藁)』 권하(卷下), 「봉화산천도인사다지작(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 몸과 마음이 모두 환하게 열리게 되는 경지를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 열반의 경지라고 한다. 바로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진정한 모습이다.
초의는 사람들에게 차 생활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일지암에서 차밭을 직접 일구어 해마다 봄이 되면 만들어 내는 차는 맛이 대단했다고 한다. 초의는 김정희, 김명희, 신위, 홍현주 등 당대의 유학자들과 교유를 돈독하게 하였는데, 그들을 이어 주는 매개물이 바로 차였다. 특히 그는 추사 김정희와 평생 교유하였는데, 초의의 선 사상과 차 생활은 김정희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