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1. 삼국의 불교 수용과 그 성격
  • 불교 전래와 공인
김남윤

삼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시기는 4세기 후반이다. 고구려에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다. 이어서 374년에 승 아도(阿道)가 들어왔으며 이듬해에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순도와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1)『삼국사기』 권18, 소수림왕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석아도(釋阿道) ; 『삼국유사』 권3, 흥법(興法) 순도조려(順道肇麗).

백제에서는 384년(침류왕 1) 동진(東晉)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오자 왕이 그를 맞이하여 대궐에 모시고 예를 갖추어 경배하였다. 이듬해에는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열 명을 승려로 만들었다고 한다.2)『삼국사기』 권24, 침류왕 ; 『해동고승전』 권1, 석마라난타(釋摩羅難陀) ; 『삼국유사』 권3, 흥법 난타벽제(難陀闢濟).

이러한 외교 관계를 통한 공식 전래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불교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동진의 지둔 도림(支遁道林, 314∼366)이 고구려 도인(道人)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전하고 있다.3)『해동고승전』 권1, 석망명(釋亡名) ; 『양고승전(梁高僧傳)』 권4, 축법심(竺法深). 지둔은 격의 불교(格義佛敎)의 학장(學匠)으로 366년에 사망한 인물이며, 도인이란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 여겨진다. 따라서 고구려는 366년(고국원왕 36) 이전에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으며 도인이라 불린 승려와 같은 존재도 있었던 것이다.4)박윤선, 「고구려의 불교 수용」, 『한국고대사연구』 35, 한국고대사학회, 2004 참조.

백제는 마라난타가 오기 이전인 372년(근초고왕 27)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한 사실이 있다.5)『삼국사기』 권24, 근초고왕 27년. 당시 동진에서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 왕실에도 알려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라난타도 동진에 파견한 사신과 함께 백제로 왔을 것이다. 마라난타가 오자 왕이 극진히 맞아들이고 이듬해에 절을 짓고 승려까지 배출한 사실은 그 이전에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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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 출토 금동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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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늦은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신라에서도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불교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공인되는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눌지왕 때 고구려에서 묵호자(墨胡子)라는 서역승이 와서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의복과 서적, 향을 보냈는데 그 향이 무엇인지 몰라 나라 안에 두루 물으니 묵호자가 ‘이것은 향이고 불에 태우면 향기로워 정성이 신성(神聖)에 통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성이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고 향을 태우면서 발원하면 반드시 신령한 응험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또 왕녀가 병이 나서 위독하였는데 묵호자가 향을 피우면서 기도하니 나았다고 한다.6)『삼국사기』 권4, 법흥왕 15년.

아도(阿道·我道) 또한 미추왕 때 고구려에서 계림에 왔는데 사람들이 전에 보지 못하던 바라 꺼리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7)『삼국유사』 권3, 흥법 아도기라(阿道基羅) ; 『해동고승전』 권1, 석아도(釋阿道). 무의(巫醫)가 공주의 병을 치료하지 못하자 아도가 대궐에 들어가 치료해 주었는데, 왕이 소원을 묻자 ‘천경림(天鏡林)에 불사를 창건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였다. 또 비처왕 때 아도가 시자(侍者) 세 명과 함께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며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종종 신봉자가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승(僧)’이라는 이름을 몰랐던 까닭에 ‘아두삼마(阿頭彡麽)’라고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도 시자들이 경과 율을 강하니 믿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묵호자와 아도의 설화를 통하여 신라에서도 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에 대하여 알고 있었고 고구려에서 불교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양나라에서 향을 보낸 것은 외교 관계를 통해서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8)아도기라조의 세주에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梁)나라에서 원표(元表)라는 사승(使僧)을 보내고 명단(溟檀)과 경상(經像)을 보내왔다고 한다.”라고 되어 있다. 신라는 521년(법흥왕 8)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당시 양 무제(武帝)는 숭불로 유명한 군주였다. 또 나제 동맹을 맺은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서도 불교를 알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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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석당(栢栗寺石幢)
백률사 석당(栢栗寺石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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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년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401년에 돌아와 왕위에 오른 실성왕은 고구려에서 불교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의 왕명에는 자비왕·지증왕 등 불교적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488년에는 비처왕이 일관(日官)의 말에 따라 내전의 분수승(焚修僧)을 사살하였던 일이 전하고 있어9)『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 당시 신라 왕실에 불교 승려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527년 법흥왕의 측근인 이차돈은 왕의 뜻을 받들어 아도가 전한 불교를 널리 펴기 위하여 천경림에 흥륜사(興輪寺)의 창건을 추진하고 있었다.10)『삼국유사』 권3, 흥법 원종흥법(原宗興法) ; 『삼국사기』 권4, 법흥왕. 그러나 이차돈은 조정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사형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차돈은 자청하여 자신이 희생되겠다고 나섰다고 하지만 법흥왕은 자신의 뜻과 달리 귀족들의 압력을 받고 그를 사형에 처해야 했다. 이후로 법흥왕은 529년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였고11)『삼국사기』 권4, 법흥왕 16년. 말년에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흥륜사의 건립은 이차돈의 순교 사건을 거치고 535년이 되어서야 공사가 재개되었다.12)이기백, 「신라 초기 불교와 귀족 세력」, 『진단학보』 40, 진단학회, 1975 ; 『신라 사상사 연구』, 일조각, 1986, 78∼80쪽. 불교 공인은 귀족 세력과의 일정한 타협 위에 535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신라에서 법흥왕의 불교 공인은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앞서 전도승(傳道僧) 묵호자나 아도는 공주의 병을 치료해 왕실과 연결되었지만 국인(國人)들은 그들을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귀족들이 반대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나 백제도 전통 무교(巫敎)를 기반으로 하였던 만큼 신라처럼 심하지는 않았겠지만 반발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는 왕자(王者)에게 유리한 반면 전통적 세력 기반과 신앙을 유지하고 있던 귀족들에게는 불리하였다. 귀족들이 불교 수용을 반대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족적(族的) 기반은 부정되고 왕권에 복속되는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재래의 천신(天神) 관념을 중심으로 한 전통 무교에서는 왕과 족장이 대등한 관계였고, 귀족들은 독자적인 기반과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여러 집단을 통합하면서 집권적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앙이나 관념이 아닌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였다. 삼국은 4세기부터 불교를 알고 있었고 왕실의 주도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고구려나 백제보다 늦었지만 법흥왕대(재위 514∼540)의 신라 역시 왕권을 강화하고 집권 체제를 정비하던 시기였다.

불교 공인을 전후한 시기에 율령을 반포하고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삼국은 왕권을 강화하면서 체제를 정비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법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불교는 여러 집단의 통합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상이자 종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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