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2. 삼국의 불교학
  • 불경 전래와 신라의 불교학
김남윤

신라에는 진흥왕대 이후 한역된 불전이 속속 수입되었다. 각덕(覺德)이 양나라에 구법하고 549년(진흥왕 10) 사신과 함께 귀국하면서 불사리를 가져온 것을 필두로 565년(진흥왕 26) 명관(明觀)이 진나라에서 1,700여 권의 경론을 가지고 돌아왔다.41)『삼국유사』 권3, 탑상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 575년(진흥왕 36)에는 안홍(安弘)이 수나라에 구법하고 호승 비마라 등과 함께 『능가경(稜伽經)』·『승만경(勝鬘經)』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다.42)『삼국사기』 권4, 진흥왕 37년. 그 이후로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자장(慈藏) 등 여러 승려들이 중국 유학에서 돌아왔다.

특히,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 신라에 불경과 불상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당나라에 대장경 한 부를 청하여 삼장(三藏) 400여 함을 가지고 귀국하였다.43)『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자장정률(慈藏定律). 이로써 당시 중국에 전해진 불전은 신라에 거의 다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지명이 진나라에 유학(585∼602)하고 귀국하자 진평왕은 그의 계행을 존중하여 대덕(大德)으로 삼았다.44)『삼국사기』 권4, 진평왕 24년. 지명의 저술에 『사분율갈마기(四分律羯磨記)』가 있어, 그의 귀국으로 사분율에 의한 수계작법(受戒作法)이 신라에서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544년(진흥왕 5) 흥륜사의 낙성과 더불어 승려의 출가를 허용함에 따라 수계작법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지명의 계율은 이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원광은 진(陳)나라에 유학(589∼600)하고 귀국한 뒤 귀산과 추항이 찾아와 종신토록 경계로 삼을 만한 말을 구하자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10중계가 있지만 너희는 신하와 아들이 되어 지키기 어려울까 두렵다.”고 하며 세속 5계를 주었다.45)『삼국사기』 권45, 열전 귀산(貴山) ; 『삼국유사』 권5, 의해 원광서학(圓光西學). 여기에서 원광은 『범망경(梵網經)』에 설해진 10중48 경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확대보기
통도사 금강 계단
통도사 금강 계단
팝업창 닫기

자장은 입당 유학(636∼643)에서 귀국한 뒤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고 대국통(大國統)의 지위에 올라 승단(僧團)의 모든 규율을 관장하였다. 또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戒壇)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자들에게 계를 주었다. 자장의 『보살계본』은 원광을 이은 것이며 수계작법은 사분율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로 보이는 원승(圓勝) 역시 당나라에 유학하였다가 자장과 함께 귀국하였는데, 『범망경기(梵網經記)』·『사분율갈마기』 등의 저술을 남긴 것을 보면 계율 학승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계율은 사분율 중심의 소승 계율과 『범망경』의 대승보살계를 함께 받아들여 활용한 데 특색이 있다. 이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승려들이 국정을 자문하고 정복 전쟁에도 참여하였던 사실에서 좀 더 적극적 계율관이 요구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대승 교학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원광은 진나라에서 삼장을 두루 공부한 뒤 『열반경』과 『성실론』에 심취하였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장안으로 와서 섭론(攝論)을 공부하였다.

당시 수나라에는 진제(眞諦)가 와서 인도의 유식론사(唯識論師) 무착(無著)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번역해 내었고, 이를 근본 경전으로 하는 학파가 성립되었으며, 섭론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섭론학파는 후일 현장(玄奘)의 신유식과 구분하기 위하여 구유식이라고 한다. 섭론학은 모든 사물 현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중관 계통의 삼론학과 달리 인간과 세계의 모든 사물 현상은 오직 하나의 근본 의식(意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확대보기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팝업창 닫기

원광이 귀국하면서 유식 사상이 신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또 원광은 『여래장경(如來藏經)』을 연구하여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와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를 남겼다. 여래장 사상은 또한 섭론학에서 말하는 청정무구한 제9식에 통하는 것이었다.

자장도 당나라에서 섭론을 수학하고 귀국한 뒤 분황사에 머물며 궁중에 들어가 『섭대승론』을 강하였다. 자장은 『관행법(觀行法)』을 저술하였다고 전하는데,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입장에서 유가행(瑜伽行)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유식학에 관계된 저술로 보인다. 그는 또 『화엄경』에 조예가 깊었고, 중국 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감응하고 귀국한 후 태백산·오대산을 문수의 주처로 설정하여 문수 신앙을 펼쳤으며 『아미타경(阿彌陀經)』에 대한 저술도 남겼다.

혜숙(惠宿)은 진평왕대에 미타사를 창건한 정토 수행자였으며, 사복(蛇卜)은 『화엄경』 수행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낭지(朗智)는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강하였고 『화엄경』도 습송하였다. 뒤에 의상의 제자가 된 지통(智通) 과 원효가 찾아와 그에게 배웠고, 중국 청량산에 구름을 타고 가서 청강하였다는 설화도 전한다.46)『삼국유사』 권5, 피은 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 또 원효에게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짓게 하였는데, 초장이란 삼론을 배울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연 유무(有無)의 도리를 관해야 한다는 뜻에서 초장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혜공(惠空)은 원효가 경론에 대한 주석서를 찬술할 때 매양 그에게 질의하였다는 인물인데, 승조(僧肇, 374∼414)의 『조론(肇論)』을 보고 옛날 자신이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47)『삼국유사』 권5, 의해 이혜동진(二惠同塵). 『조론』은 대승의 공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어 이후 중국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함(安含)은 601년(진평왕 23) 수나라에 가서 “십승비법(十乘秘法)과 현의진문(玄義眞文)을 5년 동안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지의의 『십승관법』과 『법화현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신라의 불교학은 대·소승의 율과 정토·화엄·법화·삼론·천태·밀교 등 여러 분야가 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주류는 원광에서 자장으로 이어지는 유식 사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장이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가지고 645년 당나라에 귀국하여 호법(護法) 계통의 신유식을 전하고 『유가론』·『성유식론』 등을 새로 번역해 내자 신라 학승들이 높은 관심을 가지고 다투어 유학하였다.

삼국의 불교 이해와 연구는 중국 남북의 불교와 교류하면서 경전과 논서(論書)들을 수입하고 당시 유행하고 있던 여러 학파의 교학을 받아들여 이루어졌다. 중국은 수·당나라 때에 점차 독자적 불교를 성립시키는 단계로 들어가면서 천태종·법상종·화엄종 등의 종파들이 성립되었다. 삼국의 불교학 연구도 이러한 흐름을 따르며 이루어졌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