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3. 불교 신앙의 시작과 전통 신앙
  • 불교와 무교 신앙의 습합
김남윤

고구려에서 신라로 건너와 불교를 전하였다는 묵호자나 아도는 모두 왕녀의 병을 치료하는 것을 계기로 왕실과 연결되었다. 특히, 아도는 무의가 고치지 못한 병을 낫게 하였다. 치병은 전통 사회에서 무(巫)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제 재래의 무교(巫敎)보다 불교가 치병에 더 효험을 보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묵호자는 향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태워 향기를 내면 정성이 신성에 통하고 반드시 신령한 감응이 있다고 하고, 신성은 ‘삼보(三寶)’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불교의 삼보란 불(佛)·법(法)·승(僧)을 말하는데 여기서 무교의 신성이 불교의 삼보로 대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승려를 가리키는 ‘중’이라는 말도 무를 뜻하는 ‘차차웅(次次雄)’, 곧 ‘자충(慈充)’에서 나온 말이었다.48)『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제이남해왕(第二南海王).

이처럼 불교는 처음에 무교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무교의 바탕 위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그러나 불교에 대한 무교 쪽의 반발도 적지 않아 신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되어 공인되기까지 상당 기간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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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출지(書出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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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불교 공인 이전의 일로 사금갑(射琴匣) 설화를 보면, 488년 비처왕(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 왕에게 이른대로 이를 뒤쫓던 중 연못에서 노인이 나타나 “금갑(琴匣)을 쏘라.”는 글을 바쳤다. 이에 따라 왕이 궁으로 돌아가 금갑을 쏘니, 거기에는 내전(內殿)의 분수승(焚修僧)이 궁주(宮主)와 사통하고 있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 이로부터 정월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고 하고 찰밥을 지어 제사하는데, 이날은 사람들이 모든 일을 꺼리고 금하는 날이 되었다고 한다.49)『삼국유사』 권1, 기이 사금갑(射琴匣).

이 설화에서 궁중에 불전과 승려가 있었고 궁주는 이미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신라 왕실은 이 무렵에 불교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고 신자도 있었음을 보여 준다. 분수승을 처형한 이 사건은 불교에 대한 전통 무교의 반발에서 일어나게 되었을 터인데, 이를 계기로 불교는 상당한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법흥왕대까지도 불교의 공인이 쉽지 않은 사정이었기 때문에 이차돈의 처형을 거치고서야 공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인 이후로 불교가 왕실의 적극적 후원을 받아 확산되면서 전통 무교 쪽도 불교에 협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진평왕대에 있었던 일을 전하는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는 경주 서쪽에 있는 선도산의 신인 성모가 불사에 기쁘게 동참하였다는 내용이다. 비구니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고 하는 데 힘이 모자랐다. 그녀의 꿈에 선녀가 나타나 “나는 선도산 성모(聖母)인데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을 기뻐하며 금 열 근을 주어 그 일을 돕고자 하니 나의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어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십삼불(五十三佛)과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여러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을 그리고, 해마다 봄가을 두 철에 열흘 동안 남녀 신도를 많이 모아 모든 중생을 위해 점찰법회(占察法會)를 베푸는 것으로 일정한 규정을 삼으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지혜는 그 말에 따라 사람들을 이끌고 신사(神祠)에 가서 황금 열 근을 파내어 불전을 수리하였다.50)『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선도성모는 주존 삼상을 비롯한 장엄 불사에 재원을 마련해 주고 그와 아울러 천신과 오악의 산신도 모셔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신라의 오악이란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서의 계룡산, 북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父岳, 公山)을 말하며 중사(中祀)로서 신라 말까지 국가의 제사 대상이었다.51)『삼국사기』 권32, 잡지(雜志) 제사(祭祀) 신라(新羅). 또 선도성모는 선도산의 신으로 혁거세와 알영도 낳았다고 전하고 있어 전통적으로 신앙되었던 신으로 볼 수 있다.

선도성모수희불사의 내용은 전통 무교 신앙과 불교가 갈등 없이 융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새로 들어온 불교가 국가의 후원 속에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자 전통적으로 신앙되었던 천신과 산천신들이 새로운 신앙을 따르며 후원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무교의 악신(惡神)들은 불교에서 계를 주고 교화하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가야 땅에 있는 연못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는데 만어산(萬魚山)의 다섯 나찰녀(羅刹女)가 그 독룡과 교통하며 해마다 번개와 비를 내 려 4년 동안이나 오곡이 익지 못하였다. 가야 수로왕의 주술로도 이 일을 막을 수 없었는데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하였더니 나찰녀가 오계(五戒)를 받았고 그 후로는 해악이 없었다고 한다.52)『삼국유사』 권3, 탑상 어산불영(魚山佛影).

또 원광은 삼기산(三岐山) 신의 권유로 중국에 유학하고 귀국한 뒤 그 신(老狐)을 찾아가서 수계하였던 사실이 있다.53)『삼국유사』 권4, 의해 원광서학. 혜통(惠通)은 중국에서 공주의 병을 치료하며 독룡을 쫓아내었는데 그 독룡이 신라에 건너와 앙갚음으로 큰 해독을 끼치고 있었다. 혜통이 귀국한 뒤 그 용에게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주니 해악이 비로소 그쳤다고 한다.54)『삼국유사』 권5, 감통 혜통항룡(惠通降龍).

무교에서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물리치려면 무(巫)가 신에게 제사하고 귀신을 부리고 주술을 행하였다. 불교를 수용한 뒤로는 불법의 힘으로 원귀를 다스리고 그 원인을 제거하여 해결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외적의 침략을 막는 것도 밀교(密敎)의 비밀법으로 하였고 기상 이변에도 승려가 향가(鄕歌)를 지어 불러서 해결하였다.

선덕여왕의 병환에 밀교 승인 밀본(密本)이 『약사경(藥師經)』을 독송하고 육환장(六環杖)으로 늙은 여우를 찔러 마당에 내던지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 승상 김양도(金良圖)가 어렸을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 말도 못하게 되어 밀본을 초청하였다. 그가 오기 전에 먼저 대력신(大力神)이 와서 귀신들을 잡아가고 많은 천신이 기다리는 가운데 밀본이 오니 병이 나았다고 한다.55)『삼국유사』 권5, 신주 밀본최사(密本催邪). 신라에 침입해 온 당나라 군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밀교 승 명랑(明朗)은 문두루(文豆婁) 비밀법을 행하였다. 이처럼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물리치는 일은 주로 밀교 승려가 담당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 이변이 일어나면 무의 주가(呪歌)에 해당하는 승려의 향가로 해결하였다. 진평왕대에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에 유람하였을 때 혜성이 나타나자 융천(融天)이 혜성가(彗星歌)를 지어 부르니 곧 괴변이 사라지고 침입해 왔던 일본 군사도 물러갔다고 한다.56)『삼국유사』 권5, 감통 융천사혜성가(融天師彗星歌). 삼국통일 후의 일이지만 경덕왕대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난 이변에도 월명(月明)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불러서 사라지게 하였다.57)『삼국유사』 권5, 감통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

불교는 인도에서 재래 신앙을 수용하고 다시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쳐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여러 지역의 토착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복잡한 내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불교가 삼국에 들어와서 전통의 무교 신앙과 습합(習合)하여 주술적·복합적 성격을 보이게 되었다. 불교가 점차 확산됨에 따라 무교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은 감소되어 기층으로 침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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