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3. 불교 신앙의 시작과 전통 신앙
  • 불연국토설과 제석천 신앙
김남윤

불교가 전통 신앙의 신과 무의 기능을 융화하는 것과 함께 재래의 신성 지역도 불교 성지로 바뀌게 되었다. 신성한 땅은 예로부터 전불(前佛)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는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읍락(邑落)이나 국가의 수호신이 있는 것으로 믿었던 명산대천(名山大川)에도 부처나 보살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아도 설화에서 그의 어머니 고도령이 아도에게 예언한 바에, 신라에는 금후 3,000여 월이 지나면 호법의 왕이 나타나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그 나라 서울에 일곱 군데 법이 머무는 땅이 있다고 하였다. 곧, 천경림(天鏡林)·삼천기(三川岐)·용궁남(龍宮南)·용궁북(龍宮北)·사천미(沙川尾)·신유림(神遊林)·서청전(婿請田)이 그곳으로 모두 전불 시대 가람터였다는 것이다.

이 일곱 곳은 원래 무교 신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전통적 신성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8)소도(蘇塗)와 같은 곳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이기백, 「삼국시대 불교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 『역사학보』 6, 역사학회, 1954 : 『신라 사상사 연구』, 일조각, 1986, 26쪽). 삼한(三韓)에서 소도는 제의를 행하는 곳이고,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귀신을 섬기는데 도둑이 도망쳐 들어가도 돌려보내지 않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런데 불교의 확산과 함께 과거불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라고 하면서 불교 성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후일 이곳에 각각 사찰을 세웠는데 천경림에 흥륜사, 삼천기에 영흥사(永興寺), 용궁북에 분황사(芬皇寺), 용궁남에 황룡사(皇龍寺), 사천미에 영묘사(靈妙寺),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서청전에 담엄사(曇嚴寺)가 건립되었다.

또 황룡사에는 과거 가섭불이 좌선했다고 하는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있다고 전한다.59)『삼국유사』 권3, 탑상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황룡사장륙(皇龍寺丈六). 이처럼 전불과 인연이 깊은 곳이라는 설은 더 나아가 불보살의 진신(眞身)이 상주하고 있다는 관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관념은 경주뿐 아니라 지방에까지 확산되고 후세에도 지속되어 오늘날에도 그러한 지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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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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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이 당나라에 갔을 때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하여 자장에게 신라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일만 문수가 그곳에 상주하니 가보라 하였다. 귀국 후 자장은 오대산과 태백산에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친견하였다고 한다.60)『삼국유사』 권3, 탑상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법화경』을 항상 독경하던 영취산의 낭지도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암자를 가섭불 때의 절터라고 하고, 산 이름을 석존이 자주 설법하였던 영취산이라고 하였다.61)『삼국유사』 권5, 피은 낭지승운보현수. 사복 설화에서는 경주에 연화장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볼 수 있다.62)사복은 자기 어머니의 관을 메고 활리산(活里山) 기슭으로 갔는데 띠풀 줄기를 뽑으니 찬란한 세계가 열려 그 속으로 들어갔다. 일연은 찬시(讚詩)에서 그곳을 연화장 세계라고 하였다. 의상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찾아 낙산(洛山)에서 친견하였다.63)『삼국유사』 권3, 탑상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觀音) 정취(正趣) 조신(調信). 그가 친견한 관음보살의 현신은 곡식의 풍요를 관장하는 지모신(地母神)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예는 전통적 산신·지신 관념에 새로 들어온 불교의 불보살 관념이 습합되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자주 등장하는 것이 관음보살인데 관음은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이 그 이름을 부르면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현실의 고통을 해결해 준다고 신앙되었다. 그래서 관음보살에게 기원하여 병을 고치고 눈먼 아이가 눈을 뜨고 자식 없던 이가 아들을 얻었다는 영험 설화가 다수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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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선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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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전통 무교 신앙의 중심이었던 천신(天神)은 불교의 제석천(帝釋天)으로 섭화(攝化)되었다. 제석천이 무교의 천신 관념과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제석천이 주하는 욕계 제2천인 도리천(忉利天)은 이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위치하며 사방 각 8천과 중앙 1천을 합쳐 33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석천은 그 33천의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에 주하며 33천을 다스리고 있으므로 제천의 임금이라고 한다.64)불교에서 제석천은 업보신(業報神)으로 누구나 사불괴정(四不壞定)을 닦으면 33천에 태어나며, 일찍이 인간일 때 사문·바라문·빈자에게 보시하여 이름을 석(釋, sakra, 堪能)이라 한다고 설해져 있다. 제석천은 창조신보다 지배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진평왕이 내제석궁(內帝釋宮, 곧 天柱寺)에 행차하였는데 섬돌을 밟자 돌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져 그것을 옮기지 말고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했다고 한다. 또 즉위한 원년에 하늘에서 상제(上帝)가 옥대(玉帶)를 내렸는데 왕은 교사(郊社)와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으레 이 옥대를 찼다고 한다.65)『삼국유사』 권1, 기이 천사옥대(天賜玉帶). 여기서 하늘의 상제는 제석으로 볼 수 있다. 진평왕은 왕위에 올라 초인적 힘을 과시하였고, 하늘에서 내려준 옥대를 띠고 사직과 종묘의 제사를 주관한 것이다. 전통적 천신이 제석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신앙은 그대로 계승된 것을 볼 수 있다.

또 선덕여왕은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낭산(狼山)의 양지에 장사를 지냈다.66)『삼국유사』 권1, 기이 선덕여왕지기삼사(善德女王知機三事). 그 뒤 670년에 당나라 군대가 신라를 침략하였을 때 명랑이 낭산 남쪽 신유림에 임시로 절을 지어 유가(瑜伽) 명승 12명과 함께 문두루 비밀법을 설하여 물리쳤다. 679년 절을 고쳐 지어 사천왕사를 완성하였고67)『삼국유사』 권2, 기이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 이로써 선덕여왕의 신성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천왕천이 도리천 바로 아래 수미산정 밑의 4면 중턱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사방, 즉 동방 지국천(持國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북방 다문천(多聞天)으로 각각 그 밑의 인간계를 관찰하고 그 선악 행위를 제석천에게 보고한다. 제석천은 인천(人天)의 지배자로서 사천왕의 보좌를 받아 일을 수행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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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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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대에 신라 궁궐에는 내제석궁, 곧 천주사가 있었다. 그 뒤로 불교의 천(天) 관념이 확대되면서 천주사에 이어 사천왕사의 조영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호법의 사천왕은 특히 통일전쟁기에 크게 신앙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를 수호하는 천신인 제석과 사천왕이 신라왕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고 불국토인 신라를 수호하는 존재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제석 신앙의 전통이 고려시대로 이어져 단군 신화에 환인이 제석천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에 불교는 왕실과 귀족 중심의 종교였으며 일반 백성은 여전히 전통 무교 신앙 속에서 살아갔던 것 같다. 불교가 일반 백성에까지 확산된 것은 통일기 원효 등에 의한 대중 교화 활동이 펼쳐진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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