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4. 국가적 불사와 법회
  • 탑과 불상의 조성
김남윤

탑(塔)은 본래 석가의 사리(舍利)를 봉안하기 위한 묘탑에서 시작되었다.75)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다비(茶毘)를 치르고 나온 유골을 봉안하기 위해 인도의 여덟 곳에 탑을 세운 것이 최초이며, 아소카왕이 다시 이 여덟 탑의 불사리를 나누어 8만 4천 기의 탑을 세우고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고 한다. 불사리를 안치한 탑은 예배와 공경의 대상으로 일찍부터 불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사찰에서도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삼국에 사리가 전래된 사실은 549년(진흥왕 10)에 유학승 각덕(覺德)이 양나라에서 사신과 함께 돌아오면서 부처의 사리를 가져오자 왕이 백관에게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이어서 안홍도 진나라에 구법하고 귀국하면서 『능가경』·『승만경』과 불사리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장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머리뼈와 치아, 사리 100알과 부처가 입었다는 가사를 가지고 645년(선덕여왕 14)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건의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가져온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오대산 중대에 적멸보궁을 세우고 그 지하에 부처의 머리뼈를 봉안하 고 통도사 계단(戒壇)과 태화사(太和寺) 등에도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삼국에서 탑을 처음 세울 때는 목조 건물로 건립하였다. 대표적 예가 황룡사의 9층 목탑이며 심초석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된 바 있다. 또 평양 청암리 사지(淸巖里寺址, 일명 金剛寺址)의 중심부에 있는 8각 기단은 목탑지로 추정되었고, 그 동·서·북쪽에 세 채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단으로 추정하면 건물 높이가 약 90m 정도 되어 황룡사 9층탑 못지않은 큰 규모의 탑이었다. 부여 군수리(軍守里) 사지에서도 목탑지가 발견되었으며 심초석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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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리 사지 발굴 평면도
청암리 사지 발굴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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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은 처음에 삼국 모두 중국에서 전래된 양식을 따라 다층 목조 건물로 건립하였다. 사찰의 중심부에 크게 자리 잡아 1탑 3금당 또는 1탑식 가람 배치를 이루었고 탑이 불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삼국 말에는 석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목탑의 각 부재를 석재로 바꾸어 건립하기 시작한 모습을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에서 찾아볼 수 있다.76)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8 삼국의 문화, 1998 참조.

탑 건립에 대한 기록으로 맨 먼저 요동성의 육왕탑(育王塔)을 들 수 있다.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요동성에 이르러 오색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가서 찾아보았더니 3층의 흙탑(土塔)이 있었다. 위는 가마솥을 덮은 것 같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그곳을 한 길쯤 파보니 지팡이와 신이 나오고, 또 범서(梵書)로 쓰인 명(銘)이 나왔는데 신하가 그 글을 알아보고 불탑이라고 말하였다. 성왕이 이로 인하여 신앙심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다고 한다.77)『삼국유사』 권3, 탑상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

이것은 고구려왕이 요동성에 목탑을 건립한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1206∼1289)은 이를 불법 전래 이전의 일로 여겼고, 흙탑에 대하여는 “아육왕이 염부제주(閻浮提洲)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탑의 건립이 그만큼 오래전 일이었고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연기 설화로 보인다. 또 고구려왕이 국경을 순행하고 탑을 세운 것 역시 전륜성왕설에 따른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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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 중의 마애탑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 중의 마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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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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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황룡사 9층탑 조성에 대하여는 안홍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이웃 나라들의 침해를 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고, 9층에 각각 일본·중화·오월 등 아홉 나라의 이름을 배치하였다.78)『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구층탑. 곧 부처의 위력에 힘입어 주변 나라들을 진압하려는 기원을 표명한 것이다. 9층탑은 선덕여왕대에 자장의 건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는데, 605년(진평왕 27) 안홍이 사리를 가지고 돌아와서 밀교 경전에 의거하여 사리탑 건립의 공덕을 말하고 『동도성립기』를 지은 것도 탑 건립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9층탑에 앞서 황룡사의 장륙삼존상이 국가적 불사로 이룩되었는데, 그 조성 연기가 자세히 전하고 있다. 진흥왕대에 동해안에 큰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는데, 인도 아육왕이 막대한 양의 황철(黃鐵)과 황금을 모아 석가 삼존상을 주성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인연 있는 국토에 닿아 이루어질 것을 축 원하며 삼존상 모형과 함께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낸 것이었다. 그것으로 574년(진흥왕 35)에 장륙존상을 단번에 조성하였다고 한다.79)『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장륙. 진흥왕은 아소카왕이 세 번씩이나 조성하려다 실패한 불상을 단번에 주성하여 전륜성왕으로서의 권위와 함께 신라가 진정한 불국토임을 과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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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장륙삼존상 받침대
황룡사 장륙삼존상 받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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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묘사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은 승려 양지(良志)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양지는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하고 신묘함이 비길 데 없었으며 영묘사 불상 외에도 천왕사 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삼존불상과 금강신(金剛神) 등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 온 성안의 남녀가 진흙을 다투어 운반하며 풍요(風謠)를 불렀다고 하며, 그 노래는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인생은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功德) 닦으러 오라.”는 것이었다.80)『삼국유사』 권4, 의해 양지사석(良志使錫).

영묘사는 선덕여왕대에 창건된 사찰로서 장륙삼존상의 조성도 국가적 불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불사에서 시작된 풍요는 이후로 사람들이 일할 때 부르는 노동요가 되었다고 한다. ‘공덕 닦으러 오라.’는 풍요의 내용은 내생을 위하여 공덕을 쌓으라고 권장하는 것으로 업보 윤회설에서 나온 것이 된다.

삼국에서 국가적 불사로 사찰, 탑, 불상을 조성한 것도 업설에 바탕을 두고 내생을 위한 공덕을 쌓는 일이었다. 또한, 대규모의 불사는 불국토 관념에서 호국을 기원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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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유사천왕상전(彩釉四天王像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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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유사천왕상전(彩釉四天王像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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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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