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5. 내세관과 미래불 미륵 신앙
  • 불상 조성의 발원
김남윤

삼국 후반기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조상기(造像記)가 새겨져 있는 것이 상당수 남아 있어 불상의 명칭, 조성 연대, 발원 내용 등 신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불상은 대체로 소형이고 개인이나 신앙 단체가 조성하였다.

먼저 고구려 불상으로 대화13년명(大和十三年銘) 석불상은 공덕이 칠세 부모에게 미치고 중생이 모두 함께 악도를 떠날 것을 기원하며 조성하였다 는 명이 있다.91)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대화 13년명 석불상(大和十三年銘石佛像)」, 앞의 책, 120∼122쪽. 영강7년명(永康七年銘) 금동 광배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하여 미륵존상을 조성하고 어머니가 자씨(慈氏, 미륵)의 삼회 설법을 만나 보리를 이루고 죄업은 소멸되기를 기원하는 명이 있다.92)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연강 7년명 금동 광배(永康七年銘金銅光背)」, 앞의 책, 122∼126쪽. 건흥5년명(建興五年銘) 금동 광배에는 청신녀(淸信女) 아암(兒庵)이 석가문상을 만들고 생생세세(生生世世) 부처를 만나 법을 듣게 되고 모든 중생이 이 소원을 같이하길 바란다는 명이 있다.93)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건흥 5년 병진명 금동 광배(建興五年丙辰銘金銅光背)」, 앞의 책, 132∼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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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7년명 금동 여래 입상
연가7년명 금동 여래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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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7년명(延嘉七年銘) 금동 여래 입상은 광배 뒷면에 조상기가 있는데 “낙랑(樂良) 동사(東寺)의 승려와 제자 40인이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하였는데 그 29번째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비구 □□가 공양하였다.”94)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연희 7년명 금동 광배(延嘉七年銘金銅光背)」, 앞의 책, 126∼129쪽.는 것이다. 곧, 승도들이 천불상 조성 불사를 발원하여 이루고 불상마다 각각 공양주의 이름을 밝혀 놓았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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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4년명 금동 삼존불
경4년명 금동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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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4년명(景四年銘) 금동 삼존 불상 광배에도 조상기가 있다. 비구와 선지식 다섯 명이 무량수상(无量壽像)을 만들고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가 여러 부처를 늘 기억하고 선지식들은 미륵을 만나기를 원하며 그 원에 따라 함께 한 곳에 태어나 부처를 보고 법을 듣게 되기를 기원하였다.95)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경 4년 신묘명 금동 삼존불 입상(景四年辛卯銘金銅三尊佛立像)」, 앞의 책, 129∼132쪽. 무량수상, 즉 아미타상을 만들었다면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이어야 하지만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하고 있어 불상과 발원 내용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96)기존 연구에서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미타정토와 미륵정토를 구분하지 못하였거나, 서방 왕생을 원하지만 부득이하면 다음 생에서라도 미륵불을 만나 설법을 듣기를 희구한 것 등으로 해석되었다(김영태, 「미륵 신앙」, 『삼국시대 불교 신앙 연구』, 불광출판사, 1990 참조).

이처럼 무량수상을 조성하면서 미륵을 만나기를 원하는 예는 북위의 룽먼 석굴(龍門石窟) 조상기들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4세기 초부터 6세기에 걸쳐 미륵 관계 경전들이 번역되고 미륵 신앙이 성행하며 미륵상도 많이 조성되었다. 불교 신앙의 중심이 석가에서 미륵으로 옮아가면서 망자의 내세를 위하여 미륵상을 조성한 것이다.

미륵과 무량수불(아미타불)에 대한 관념의 혼재는 기존의 내세관에 불교의 정토 관념을 받아들이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서방극락의 관념도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으로 수용하였을 터인데, 이 세상과 다른 타방 세계의 관념에 따라 서방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불은 쉽게 이해되지 못하여 도솔천에 있다는 미륵과 혼동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 삼국에서 아미타보다 미륵이 널리 신앙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미륵은 먼 미래에 하생하여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미래불이므로 미륵을 만나기 이전에 정토왕생(淨土往生)하였다가 먼 훗날 미륵에 의해 모두 함께 제도되기를 바라는 신앙으로도 볼 수 있다.97)김남윤, 「신라 미륵 신앙의 전개와 성격」, 『역사연구』 2, 역사학연구소, 19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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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명 금동 삼존불
계미명 금동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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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상인 계미명(癸未銘) 금동 삼존 불상은 아버지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명이 있고,98)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계미명 금동 삼존불 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 앞의 책, 161∼162쪽. 갑인명(甲寅銘) 금동 석가 불상은 부모를 위하여 만들고 그 ‘공덕으로 삼도(三途) 팔난(八難)을 떠나 정토에 나서 부처를 보고 법을 듣게 되기’를 기원하였다.99)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갑인명 석가상 광배(甲寅銘釋迦像光背)」, 앞의 책, 163∼164쪽. 갑신명(甲申銘) 금동 석가상도 제불(諸佛)을 만나서 길이 고(苦)에서 떠나기를 기원하고100)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갑신명 금동 석가상 광배(甲申銘金銅釋迦像光背)」, 앞의 책, 165∼166쪽. 정지원명(鄭智遠銘) 금동 삼존불상도 죽은 아내를 위하여 만들고 빨리 삼도를 떠나기를 기원하였다.101)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정지원명 금동 삼존불 입상(鄭智遠銘金銅三尊佛立像)」, 앞의 책, 16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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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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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상들은 대체로 돌아가신 부모나 부인 등 망자를 위해 조상하였고 ‘부처를 뵙고 법을 듣게 되기를(見佛聞法)’ 바란다는 기원을 담고 있다. 각각 석가불, 미륵, 아미타상을 조성한 것이지만 망자의 내세를 기원한다는 점은 공통된다.

신라의 경우도 금동 불상이 상당수 전하지만 조상기가 있는 예는 보이지 않는데, 삼국 말에 조성된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마애불상군의 조상기가 있다. 이것은 산정 부근 ㄷ자형의 천연 석굴에 모두 열 구의 불·보살·인물상을 새겼는데, 석불 북쪽에 거대한 여래 입상이 있고 동쪽과 남쪽에 보살 입상이 각 한 구씩 있어 삼존상을 이루었다. 남쪽 벽에 미륵상 한 구와 보살상 두 구를 만들었고 모두 성불하고 죄가 소멸하기를 기원한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102)한국 고대 사회 연구소, 「단석산 신선사 조상명기(斷石山神仙寺造像銘記)」, 앞의 책, 194∼197쪽. 곧, 미륵 신앙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이 석굴에서 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한 김유신이 수련을 하였다는 구전이 전하고 있고103)『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山川) 단석산(斷石山). 신선사라는 절 이름에서 화랑과 관련된 미륵 신앙의 기도처로 생각되고 있다.104)황수영, 「단석산 신선사 석굴 마애상(磨崖像)」, 『한국 불교의 연구』, 삼화출판사, 1973, 189쪽.

이처럼 삼국 후반기에 개인이나 신앙 단체가 조상한 불상은 돌아가신 부모나 처 등 죽은 사람이 삼도 또는 고에서 떠나 부처를 만나고 불법을 듣 게 되기를 기원한 예가 많았다. 발원 내용에서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업보 윤회에 따라 육도에 전생한다고 하는 불교적 내세관으로 바뀌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망자를 추선(追善)하고 아울러 발원자들의 내세를 위하여 궁극적으로는 미륵을 희구하는 신앙이 두드러진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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