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1장 불교의 수용과 신앙의 시작
  • 5. 내세관과 미래불 미륵 신앙
  • 미래불 미륵 신앙
김남윤

삼국 불교에서 처음에 신앙의 중심이 된 것은 석가모니불이었다. 삼국은 국가적 불사로 장륙존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불교의 윤회전생설에 따른 전생·현생·내생의 삼세 관념을 받아들이면서 석가불 신앙은 과거불(前佛) 및 미래불과 연결되어 신앙되었다.

불교사에서 석가모니 이외의 다양한 불보살 신앙은 대승 불교가 일어나면서 나타났다. 석가모니 시대부터 시간이 많이 흐르게 되자 ‘깨달은 자(覺者)’ 석가모니에 대한 신성화와 함께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세 그리고 미래세에도 석가모니 같은 부처님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과거불과 미래불에 대한 신앙이 나타나게 되었고, 나아가 삼세 삼천불설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 즉 타방 세계의 여러 부처를 상정하게 되면서 동방 아촉불(阿閦佛), 서방 아미타불을 비롯한 많은 부처가 나타나게 되었다.

대승 불교 신앙에서 과거 가섭불, 현세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은 모두 현재겁인 현겁(賢劫) 천불(千佛)에 속하는 부처로서 이 땅을 제도할 부처들이다. 현겁 천불 가운데 4불은 이미 출현한 과거불이고 미륵 이후 996불은 장래에 출현할 부처이다. 천불설은 또 과거 장엄겁(莊嚴劫), 미래 성수겁(星宿劫)으로 연결되어 삼세 삼천불설로 전개된다. 과거 7불은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이다. 이 가운데 앞의 3불은 과거 장엄겁의 최후의 부처들이고 뒤의 4불은 현겁의 부처들이다. 미륵은 과거 7불을 이어 출현할 현겁의 다섯 번째 부처로서 가섭불과 석가모니불을 계승하는 부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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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령 미륵 삼존상
삼화령 미륵 삼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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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에서 과거불에 대한 신앙은 이 땅이 예로부터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강조하는 불연국토설로 전개되었다. 미륵 신앙은 전륜성왕설과 결부되어 왕실과 귀족의 지배를 뒷받침하는 이념이 되었다. 삼국 후반기에 미륵 신앙은 더욱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화랑은 미륵의 화신으로 설정되었다. 진지왕대에 흥륜사 승려인 진자는 미륵상 앞에서 기도하면서 미륵보살이 화랑으로 세상에 출현하면 자신이 직접 모시겠다고 서원하고 꿈에 나타난 승려의 말을 좇아 웅천의 수원사로 미륵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스스로 서라벌 사람이라고 밝힌 한 소년을 만나는데 그가 곧 미륵의 화신임을 깨닫고 돌아와 미시랑(未尸郞)을 찾아내어 미륵선화(彌勒仙花)로 받들었다.105)『삼국유사』 권3, 탑상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신선(神仙)을 숭상하여 원화제(原花制)를 시작하고 국인이 신선을 칭하여 미륵선화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미륵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 보여 준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그 무리를 용화 향도(龍華香徒)라고 칭하였다. 용화라는 이름은 미륵이 성불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용 화수 아래의 세 차례 설법에서 온 것이다. 또 죽지랑(竹旨郞)도 미륵의 화신으로 볼 수 있다. 진평왕대에 술종공(述宗公)이 죽지령에서 한 거사를 장사 지내고 무덤 앞에 석미륵상 한 구를 안치하였는데 이로 인해 얻은 아들이 죽지랑이었다. 죽지랑은 성장하여 김유신을 따르는 부수(副帥)가 되어 통일에 기여하였고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고 한다.106)『삼국유사』 권2, 기이 효소왕대(孝昭王代) 죽지랑(竹知郞).

이처럼 화랑은 미륵의 화신으로 신라에 계속 나타났다. 전불 시대부터 인연이 깊은 불국토인 신라는 미륵의 세상을 이상으로 삼고 화랑을 내세워 통일 사업을 추진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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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마애 삼존불
서산 마애 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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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례로 석미륵이 출현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선덕왕대의 승려 생의(生義)는 꿈에 나타난 미륵상을 남산에서 파내어 삼화령(三花嶺) 위에 안치하였는데, 이 삼화령의 미륵세존은 후일 충담(忠談)이 해마다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다려 공양하는 불상이었다고 한다.107)『삼국유사』 권3, 탑상 생의사(生義寺) 석미륵(石彌勒).

그런데 미시랑 설화는 백제의 미륵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진자가 미륵을 찾아 수원사에 갔을 때 그 절의 중이 “절에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로부터 현인 철인이 머물러 있어 감응이 많으니 그곳에 가보라.”고 한 말에 따라 천산에 간다. 거기서 노인으로 나타난 산신령이 수원사 문밖에서 만난 소년이 미륵선화라고 일러 주어 서라벌로 되돌아와 미시랑을 찾아내게 되었다.

여기서 현인 철인이 많다는 천산이란 현겁 천불설에서 나왔을 것이다. 현재겁을 현겁이라고 하는 것은 천불 등 많은 현인이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미륵상 주변에 천불상이 같이 조성되기도 하는데, 현겁 천불 신앙에서도 그 신앙의 중심은 미래불인 미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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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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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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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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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미륵 신앙을 잘 보여 주는 것은 미륵사 창건이다. 무왕은 용화산 밑의 큰 못에서 미륵 삼존이 나타나자 미륵 삼존상과 불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건립하였는데 이때 진평왕도 장인들을 보내 도와주었다고 한다. 삼원(三院) 구조로 된 미륵사의 조영은 미륵불의 용화삼회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황룡사 9층탑의 조성을 건의한 자장의 문수 신앙이나 점찰법회도 미륵 신앙과 결부된 것이었다. 문수는 석가모니의 보처보살(補處菩薩)로서 미래불이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대의 귀의처로 미륵을 대신하는 성격을 띤 것이었다.108)남동신, 「자장(慈藏)의 불교 사상과 불교 치국책(治國策)」, 『한국사연구』 76, 한국사연구회, 1992, 16∼25쪽. 『점찰경』을 설한 지장보살도 석가모니의 열반 이후부터 미륵이 오기 전까지의 무불(無佛) 시대에 육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는 비원(悲願)의 보살이다.109)김남윤, 「신라 중대(中代) 법상종(法相宗)의 성립과 신앙」, 『한국사론』 1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4, 139∼140쪽.

7세기 전반에 많이 조성된 반가 사유상도 미륵보살을 조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가 사유상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수도하고 정각을 얻었듯이 미륵이 용화수 밑에서 수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며, 용수 사유상(龍樹思惟像) 또는 태자상이라고도 한다. 미륵은 미래세에 석가모니처럼 출가 수도하여 성불하고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당래(當來) 보처보살이다. 그래서 석가불 신앙 이후 가장 먼저 나타난 신앙은 미륵이었다. 대승 불교 시대에 가장 먼저 불상이 제작되었던 간다라 지역에서 발견된 조각상 가운데 대다수가 미륵상이었고, 중국에서도 불교 수용 초기부터 미륵보살상이 제작되었다. 미륵상의 모습은 교각좌상(交脚坐像)과 반가상이 위주가 되었는데, 교각좌상은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이며 반가사유상은 하생하여 용화수 밑에서 사유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110)최완수, 『불상 연구』, 지식산업사, 1984, 240∼146쪽 참조.

삼국의 미륵상도 반가 사유상 외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삼화령 미륵세존, 미륵불과 반가상이 함께 새겨진 단석사 석굴, 통상적인 부처 모습의 미륵 불상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미륵상이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 형태로 조성된 까닭은 미륵 신앙 자체가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상생 신앙과 미래의 미륵 세상에 태어나 미륵불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하생 신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국의 불교 신앙에서는 미륵 신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미륵 신앙은 윤회전생설에 따른 불교의 내세관을 수용하면서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 미래세에 미륵불을 만나 그 법을 듣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널리 신앙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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