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
  • 1. 불교 사상의 발달
  • 유식 사상과 법상종
정병삼

유식 사상은 마음과 마음 작용을 모든 인식과 존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가치의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의 인식 작용(識) 에 달려 있으며, 그 인식하는 마음의 주체가 알라야식(阿賴耶識=眞如)이라고 한다. 이 인식 작용의 대상이 되는 경계가 현상이라고 보아, 모든 존재의 성질과 모습을 탐구한다. 이런 교학 전통이 법상종을 형성하였다. 유식에서는 모든 존재를 이루어내는 인식 주체인 제8 근본식 알라야식을 설정하고, 6식의 밑바탕에 있는 자기를 중심으로 헤아리는 자아의식인 제7 마나식(末那識=心識)과,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의 기본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를 직접 접촉하면서 판별하는 5식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의식 작용인 제6 의식(意識)을 배치한 8식설을 세웠다.

신라의 유식 사상은 원광(圓光, 555∼638), 자장(慈藏, ?590∼?658) 등의 『섭대승론(攝大乘論)』 연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원광은 중국에 가서 섭론의 연구에 열중하여 뛰어난 해석을 발휘하였다. 이들을 통해 신라에 소개된 섭론 교학은 7세기에 들어 유식에 통합되어 신라 교학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며 여러 학승에게 전수되었다. 그래서 저술을 남긴 통일신라시대 승려는 대부분 유식에 관계된 저술이 있을 만큼 교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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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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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유식의 흐름은 일찍이 중국에 건너가 활동하였던 원측(圓測, 613∼696)에게서 비롯된다. 왕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유명한 승려들에게서 대승과 소승을 고루 배운 원측은 특히 당시 성행하던 유식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6개 국어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 경전 번역에도 여러 차례 참여하였다. 원측은 학설에서 다양한 견해를 추구하였고, 장안 남쪽의 종남산 운제사에서 8년 동안 은거하는 등 조용한 수행을 좋아하였다. 원측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당 태종은 그를 서명사에서 지내게 하였고, 이곳에서 23종 108권에 이르는 많은 저술을 이루어 냈 다. 신라에서 여러 차례 돌아와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나라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서명 학파(西明學派)라는 뚜렷한 흐름을 이루기도 하였고, 신라에 전해져 신라 유식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다.

원측은 중국에서 구유식에서 신유식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활동하였다. 원측은 처음에 신라 유식의 근간이었던 진제 계통의 섭론에서 기반을 닦았으나 현장이 신유식을 소개하자 이를 수용하여 선양하였다. 그러나 원측의 유식 사상은 현장을 계승한 규기(窺基)가 정립한 중국 법상종과는 다른 관점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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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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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측은 독특하고 일관된 틀로써 불교를 이해하고, 일관된 도리에 입각해서 여러 견해를 취사선택하였다. 대립되는 두 견해가 있을 때 원측은 때로는 어느 한 쪽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 쪽 모두 취하기도 하며 때로는 제삼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원측이 불교를 이해하는 일관된 틀이란 모든 교설을 방편(方便)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론이란 목적에 이르는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중생이 불타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론 자체의 논리적 체계성이나 적합성보다는 그 쓰임에 주목해서 보는 시각이다. 쓰임에 주목해서 불교의 여러 견해를 대하게 되면 각각의 견해가 제기되는 맥락과 상황 또는 현실 적용에서의 유효성 등을 두루 주목할 수 있다.114)정영근, 『원측(圓測)의 유식(唯識) 철학』,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4, 148쪽.

원측이 자신의 사상 체계를 구축하면서 핵심으로 삼은 도리는 중도(中道)이다. 원시 불교 이래 중도는 불교 사상의 기준으로서 모든 불교 사상가가 주목하였다. 중관 불교의 공(空) 사상은 논서(論書)를 통해 사상을 심화시킨 부파(部派) 불교와 대승의 유식 불교를 유(有)에 치우친 것으로 규정하고 허무주의를 무(無)에 치우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 중도임을 자부 하였다. 그런데 유식 불교에서는 부파 불교와 중관 불교를 유와 공에 치우친 것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관점이 중도라고 하였다. 원측은 이에 대해 중관과 유식 모두를 중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중도는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며 집착을 떠나면 곧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원측은 모든 불교의 가르침이 중생의 집착을 제거하여 중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유를 전개한 원측은 유식학자로서는 독특한 관점을 가졌고, 그의 유식 사상은 집착과 편견을 제거하고 중도를 밝히는 모든 불교 사상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원측은 모든 교의가 각각 한 뜻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식이 주장하는 유(소승)·공(반야)·비유비공(해심밀, 법화)의 삼시(三時) 교판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고, 교리 내용은 중생의 병에 따라 다르고 경(經)의 성질에 따라 그리고 교설(敎說)의 시기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고 하였다. 원측은 어느 하나의 입장을 배타적으로 고집하거나 두 입장을 단순히 조합하지 않고, 전체적인 안목에서 각각의 준거와 장점을 밝혀 모두를 불교 속에 포용하였다. 이러한 원측의 인식은 유식 학설뿐만 아니라 대승과 소승의 여러 교설을 폭넓게 포용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일승적인 인식 체계였다.

현상계의 분석에 중점을 두는 유식에서 인간에 관점을 돌려 수행에 차별을 두어 구분한 것이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이다. 이 설의 초점은 결코 부처가 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인 일천제(一闡提)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 있다. 신유식에서는 이를 철저히 준수하여 특유의 종지로 삼았다. 이에 대해 원측은 일체중생에게 모두 평등하게 여래가 될 가능성(如來藏)이 있으므로, 오성 모두 불성이 있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천제도 무량한 공덕을 갖춘 불보살의 위력을 만나 구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정한 단계에 오른 보살의 수행에 집중하는 신유식과는 달리 원측은 범부의 수행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그들의 구제를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였다.

여러 교설을 폭넓게 인정하는 원측의 포용적인 사상 경향을 잇는 제자들은 당나라의 법상종과는 다른 별도의 학파를 이루어 서명 학파라 불렸다.115)고익진,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160∼165쪽. 승장(勝莊)·도증(道證)·도륜(道倫) 등이 여기에 속하지만, 현장이 인도 경전을 번역할 때 참여한 신방(神昉)이나 현장에게 배운 순경(順璟)과 같이 중국 유식학의 발전에 참여한 사람도 있다. 승장은 저명한 번역가인 의정(義淨)과 보리류지(菩提流志)의 번역장에 참가한 범어 전문가로, 원측이 입적한 후에 종남산 풍덕사에 사리탑을 세워 원측에 대한 숭모 풍조를 확산시켰다. 692년(효소왕 1)에 신라에 귀국하여 왕에게 천문도를 바친 도증의 사상은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에 집약되어 태현(太賢)에게 계승됨으로써 신라 법상종 성립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었다. 중국에서 주로 활동한 도륜은 18종 57권의 다양한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그중 당대 유식 사상을 집대성한 『유가론기(瑜伽論記)』(705) 20권의 방대한 저술에서 당나라와 신라의 유식 학승이 설파한 여러 학설을 망라하였는데, 그 견해가 규기의 중국 법상종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방면에 걸친 저서를 남긴 원효(元曉, 617∼686)는 『판비량론(判比量論)』 등 유식학의 저술도 상당수 남겼다. 그의 저술에는 『유가론』이나 『섭대승론』을 비롯하여 유식과 인명(因明)에 관한 경론 13종을 인용하고 있어, 새로운 사상인 유식학을 크게 활용하여 자신의 사상 체계를 수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효는 후에 고려 법상종에서 태현과 함께 해동 조사로 추앙되었으며, 불교 논리학인 인명을 인식 논리학으로 전환시킨 진나보살(陳那菩薩)의 화신으로 일컬어졌다.

순경은 특히 인명에 뛰어난 승려였다. 순경은 신유식을 현장에게 수학한 제자로서, 유식의 논증 방법을 배우고 신라에 돌아와 전하였다. 순경이 666년경에 현장의 인명 사상을 전해 듣고 그와는 다른 자신의 견해를 당나라로 가는 사신편에 보냈더니, 현장은 이미 죽고 그 제자인 규기가 보고 감탄하였다고 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순경은 대승과 소승을 두루 배우고 청 정한 마음을 강조하는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였으며 신라에 돌아온 뒤에는 기원사에 주석하였다. 순경은 또한 『화엄경』의 “초발심에 곧 성불한다.”는 구절을 믿지 않고 비방하다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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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곡(茸長寺谷)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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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곡(茸長寺谷) 3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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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憬興)은 문무왕의 유언으로 신문왕대에 국로(國老)로 봉해지고 삼랑사에서 활동한 백제 출신의 인물이다. 경흥은 유식을 비롯하여 여러 부문에 걸쳐 40여 종의 주석서를 남겨 원효·태현과 함께 신라 3대 저술가로 꼽힌다. 저술 중에서 유식에 관한 것이 17종으로 중심을 이루지만 전하지 않아 자세한 사상은 알 수 없다.

의적(義寂)은 유식 관계 저술 4종을 비롯하여 정토·반야·법화·열반·계율 등 25종의 주석서를 지어 유식승의 왕성한 저술 활동을 계승하였으며, 의상과 만나 교리를 토론하는 등 화엄종과 교유를 갖기도 하였다. 현장에게 수학한 그는 유식의 우월성 강조에 비판적이었으며 융합적인 태도로 대승 경전의 동등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규기는 물론 원측과도 다른 독자적인 경향으로, 원효나 태현의 사상 경향과 통하는 것이었다. 금산사에서 활동하였던 의적의 유식 사상은 이후 진표의 법상종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태현(太賢)은 유가 조사라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법상종 조사로 추앙된 유식의 대가였다. 그는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주석하며 미륵과 미타상을 함께 주불로 삼는 신앙을 전개하였으며, 일체의 논과 종을 편력하였다고 기록될 만큼 불교학의 전 분야를 두루 수학하였다. 아울러 모두 50여 종의 저술을 남긴 대저술가였다. 화엄의 원융한 이치를 탐구하고 법화·열반·반야 등의 대승 경전과 여래장·중관 경전에 주석하였으며, 유가계의 계율학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정토 관계 저술도 많다. 20종이나 되는 유식 관계 저술은 초기 유식으로부터 중국 법상종의 정통이 된 호법의 유식과 인명 등 현장의 신역 논서에 대한 광범위한 주석서들이다.

태현은 유식은 원측과 도증의 견해를 계승하고 화엄은 법장과 원효를 계승하여, 유식과 중관에 대해 각기 그 진리성을 인정하는 공정한 입장에서 학설을 비판하고 계승하여 종합하였다. 태현은 중심 저술인 『성유식론학기』에서 당대 학계의 논쟁점을 포괄하여 자세하게 보여 주었다. 그는 이 가운데 공과 유의 쟁론에 대해 공과 유는 언어상으로는 다투지만 근본 취지는 동일한 것으로서, 논쟁의 의도는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는 데 있다고 하는 화쟁(和諍)의 입장을 보였다. 태현의 유식 학설은 법상종 정통인 규기의 학설을 토대로 그와 다른 경향을 보인 원측의 학설을 포용하여 종합 회통한 것이었고, 여기에 태현의 사상적 특색이 있다. 그러나 중심 입장은 유식 중도를 근본 종지라고 보는 신유식 사상이었다.116)김남윤, 『신라 법상종(法相宗)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78∼79쪽. 태현의 사상은 신라 불교학의 성과를 종합하여 유식 중도설의 입장에서 각 교설의 의미를 밝혀 성상(性相)의 대립을 지양하고 신유식 사상을 받아들여 당대의 불교를 종합 정리한 것이었다.

중대 초기 이래 유식 학승들의 활동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태현의 사상과 신앙이 중심이 되어 경덕왕대에 법상종이 형성되었다. 법상종은 유식 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계율 연구를 비롯한 광범위한 사상 연구를 수행하여 신라의 불교 사상 연구를 주도하였다. 태현은 미륵 신앙을 실천하여 이끄는 법상종의 조사가 되었다. 태현이 선도한 법상종은 경덕왕대에 왕경을 중심으로 학파적인 교단을 형성하여 미륵과 미타 신앙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보다 약간 늦게 진표(眞表, 718∼? 또는 734∼?)가 주도하는 또 하나의 법상종 계통이 있었다. 완산주 출신의 진표는 금산사(金山寺)로 출가하여 당나라의 선도에게서 배워 온 숭제(崇濟, 또는 순제(順濟))에게 배우고 자신의 몸을 던지는 치열한 수행인 망신참(亡身懺)을 실천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계법을 받았다. 진표는 또한 점찰법(占察法)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과보를 점치고 그 결과에 따라 참회 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지옥 중생까지 구제하겠다는 비원의 보살인 지장 신앙과 미륵 상생 신앙을 실천하였다. 이와 같이 진표가 선도한 법상종은 점찰법과 참회를 내세운 실천적인 교단으로서, 일반민을 대상으로 미륵과 지장 신앙을 내세우며 전개되었다. 이 흐름은 속리산의 영심(永深)과 헌덕왕의 왕자 심지(心地)로 이어지고, 석충(釋忠)을 통해 고려 태조에게 연결되는 등 문도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렇게 속리산·강릉·금강산 등지의 신라 변방 지역에 실천 신앙 중심의 교화를 전개한 진표 계통의 법상종은 기층민에게까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117)김남윤, 「신라 중대 법상종의 성립과 신앙」, 『한국사론』 1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4, 141∼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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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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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법상종은 유식 사상 연구를 중심으로 계율 연구를 비롯한 광범위한 사상 연구를 수행하여 신라의 불교 사상 연구를 주도하는 한편 미륵과 미타 및 지장 신앙을 실천하면서 화엄종과 대비되는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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