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2장 불교 사상의 확립과 일상의 신앙생활
  • 3. 선종의 수용과 신앙의 변화
  • 선종의 수용
정병삼

신라 말기에 이르러 중앙에서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귀족의 분열이 심화되고 호족이라 불리는 지방 세력이 중앙 세력에 반대하여 세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에 따라 중앙 중심의 사회 구조가 약화되고 지방 각지에는 여러 세력이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동안 신라 사회를 이끌어오던 지도 이념인 화엄과 유식 중심의 교종 불교는 여전히 이론 탐구에 집중하여 사회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의식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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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 전경
성주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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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혁신적인 선종이 형성되어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불교 사조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신라 승려들은 선종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수용하여 신라에 소개하고 정착시켜 갔다. 새롭게 지도적인 이념으로 등장한 선종의 활동 무대는 각 지방이었다. 당시 선종을 대표하는 9산 선문(九山禪門)을 비롯한 선종 사찰들은 거의 서울 경주의 외곽에 해당하는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지역 에 집중되어 있다.

교종은 경전의 이해를 통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론적 불교이다. 이에 비해 선종은 문자는 구경(究竟)의 목표로 이끌어 주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문자를 넘어선 경지인 선의 구체적인 실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실천 불교이다. 선의 수행은 각자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불성을 곧바로 깨닫는 것이다.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선종의 지향은 기존의 경전이나 부처의 권위를 부정하게 되고, 모든 형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러한 선종의 특성은 대중을 포함한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에게 교종보다 더 호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래서 이후 선종은 여러 불교 형태 중에서 가장 폭넓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선종의 이와 같은 주장은 경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신라 교종 체제를 부정하는 혁신적인 것이었고, 신라 사회의 변화 요구에 상응하는 불교계의 근본적인 개혁 요망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선종은 이보다 2세기 전에 법랑(法朗)을 통해서 신라에 처음 전래되었고, 이후 8세기 중반에 신행(神行)이 북종선(北宗禪)을 전래하였지만, 신라 사회에서 수용될 기반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 8세기 후반부터 승려들이 새로운 불교를 배우기 위해 중국에 건너가 남종선(南宗禪)을 배워 오기 시작하였다. 784년(선덕왕 5)에 도의(道義)가 당나라로 건너가고, 뒤이어 혜소(804), 혜철(814), 무염(821), 현욱(824), 도윤(825), 체징(837)이 잇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821년에 도의가 최초로 귀국한 뒤로 혜소(830), 현욱(837), 혜철(839), 체징(840)이 줄지어 신라로 돌아왔고, 당나라에서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를 환속시키던 회창 폐불(會昌廢佛)의 법난이 일어나자 무염(845), 범일(846), 도윤(847) 등이 대거 귀국하였다.

그동안 이해 기반을 갖지 못하던 선종이 신라 사회의 변화와 도의를 비롯한 도당 승려들의 귀국으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도의는 중국 선종의 형세를 크게 넓힌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을 받아서 본격적인 남종선을 신라에 처음으로 들여왔다. 그러나 교종의 반발로 왕경에서 교화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고 설악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대신 도의보다 조금 늦게 826년경에 귀국한 홍척(洪陟)은 흥덕왕의 귀의를 받을 만큼 왕실이 관심을 보여 지리산 기슭에 실상산문을 열 수 있었다. 초기의 선종은 왕실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9산 선문은 대부분 왕실이나 중앙 귀족의 지원보다는 이 시기에 새롭게 부상한 지방 세력인 호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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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지 전경
진전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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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산 선문은 명적 선사 도의를 계승한 보조 선사 체징(體澄, 804∼880)의 가지산문(迦智山門, 장흥 보림사), 증각 대사 홍척의 실상산문(實相山門, 남원 실상사), 적인 선사 혜철(惠哲, 895∼861)의 동리산문(桐裏山門, 곡성 태안사), 원감 대사 현욱(玄昱, 787∼868)의 법을 이은 진경 대사 심희(審希, 855∼923)의 봉림산문(鳳林山門, 김해 봉림사), 철감 선사 도윤(道允, 798∼868)의 법을 이은 징효 대사 절중(折中, 826∼900)의 사자산문(師子山門, 영월 흥녕사), 통효 대사 범일(梵日, 810∼889)의 사굴산문(闍堀山門, 강릉 굴산사), 낭혜 화상 무염(無染, 800∼888)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보령 성주사), 지증 대사 도헌(道憲, 824∼882)의 희양산문(曦陽山門, 문경 봉암사), 진철 대사 이엄(利嚴, 870∼936)의 수미산문(須彌山門, 해주 광조사)을 일컫는다. 이 밖에도 진감 선사 혜소(慧昭, 784∼850)의 쌍계사(하동), 요오 화상 순지(順之, 829∼893)의 서운사(개성), 보양(寶壤)의 운문사(청도) 등도 9산 선문 못지않은 일문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국가로부터 국사나 이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선사의 휘호를 받는 등 그 의의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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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 철감선사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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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산 선문의 개조를 비롯한 선승은 호족 출신이 많았고, 중앙 귀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그들 당대에는 이미 지방에 낙향하여 호족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선승을 후원하여 산문을 개창하게 한 지원 세력도 지방 호족이었다. 그래서 선종 사원은 산문을 후원하는 호족의 근거지와 가까운 지방에 자리 잡았다. 성주산문은 보령 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서 개창되었고, 사굴산문은 강릉 지방의 호족으로서 중대 진골 세력의 핵심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 도독 김공의 후원을 받았다. 봉림산문은 김해 지방의 호족인 진례성 군사 소율희 등의 지원을 받아 개창되었고, 희양산문은 문경 지방의 호족 심충과 가은현 장군 희필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사자산문은 충주 지방의 호족인 유씨 세력의 후원을 받았고, 수미산문은 개성 지방의 호족인 왕씨와 그 외척 황보씨 세력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선종은 이렇게 해당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지원을 받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불교로 시작되었다.142)최병헌, 「신라 하대 선종 구산파(禪宗九山派)의 성립」, 『한국사연구』 7, 한국사연구회, 1973, 93∼110쪽.

이와 같은 선종의 전래로 신라 하대의 불교는 기존의 전통적인 교학 불교와 대립하거나 갈등을 일으키고, 상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경전을 읽고 주석하는 교학 중심의 불교에서 자각적인 실천 불교로의 전환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후 실천 불교를 제창하는 선종과 교리 이해와 신앙을 중시하는 교종은 불교 사상의 두 축을 이루며 상호 조화와 갈등 관계 속에서 불교 사상의 중추를 이루며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입당 구법승(入唐求法僧)들에 의해 성립된 신라 선종은 중대 교학이 신라적인 사상을 추구하여 결실을 맺은 것처럼, 당나라의 조사선(祖師禪)을 신라에 그대로 옮겨 놓지 않고 신라 불교의 전통과 풍토에 적합한 독특한 선종으로 발전시켰다. 신라 선종의 특성은 화엄 사상과 화엄 신앙으로 이루어진 화엄 불교의 토대 위에 중국의 새로운 선 사상인 조사선을 수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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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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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선종을 들여온 여러 입당 구법승이 출가 후에 신라에서 화엄을 수학하다 당나라에 가서 새롭게 선종을 익힌 것에서 확인된다. 도헌·혜철·무염은 부석사, 개청은 화엄사, 행적은 해인사 등과 연관이 있다. 선사들은 귀국한 후에 선문을 개창하면서 불전을 세우고 본존불로 화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상을 봉안하였다. 도의의 선법을 계승한 체징이 보림사를 창건하고 가지산문을 개창하면서 지방 행정가인 김언경의 지원으로 857년(헌안왕 1)에 철제 비로자나불상을 주조하였고, 가지산문을 계승한 진공이 활동한 비로사의 비로자나불상과 강원도 철원의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상도 이즈음에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선종 사원에서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봉안한 것은 불신관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선종과 화엄의 상호 영향 관계를 추정하게 한다. 신라의 선종 사원에서 불전에 비로자나불상을 본존불로 봉안한 것은 당나라의 선종이 율원(律院)에서 독립하면서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만을 세운 것과 달리 독특하게 전개된 신라 선종의 특징을 보여 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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