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1. 숭불 정책과 종단 체제의 확립
  • 고려시대의 숭불 정책과 승정 제도
  • 승정 제도의 정비
최연식

고려 정부는 불교를 숭상하고 승려를 우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 교단의 자유방임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 운영 체제 안에서 불교 교단과 승려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해 나갔다. 보호와 통제라는 두 가지 원리가 불교 정책의 핵심이었다.

불교계를 보호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 정책으로 먼저 주목되는 것은 고 위 승려를 선발하는 승과(僧科)의 운영이다. 고려는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958년(광종 9)에 처음으로 과거 제도를 시행하면서 승과를 아울러 실시하였다. 승려의 과거 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특별한 제도로서 고려 과거 제도의 모델이 된 중국에도 승과는 없었다. 과거에 합격한 승려에게는 관료의 관계(官階)와 비슷한 성격의 승계(僧階)를 주어 우대하였고, 승진과 인사 이동 등에 있어서도 관료와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승과는 종파별로 시행되었는데, 초기에는 화엄종·법상종·선종 등 세 종파의 승과가 시행되었고, 1099년(숙종 4) 대각 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천태종을 개창한 이후에는 천태종이 추가되어 네 종파의 승과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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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 국사 의천 진영
대각 국사 의천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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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과의 시행과 함께 승계 체계도 정비되었다. 승려의 위계를 나타내는 승계는 신라의 경우 대덕(大德), 태대덕(太大德) 등으로 단순하였고, 명망이 있는 승려에게 특별히 지급하는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원칙적으로 승과에 합격한 사람에 한하여 승계를 주었고 체계도 훨씬 복잡해졌다. 승계는 초기에는 하위 승계만 있다가 점차 고위 승계가 추가되었는데, 완성된 고려시대의 승계 체계는 다음과 같다.

교종: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수좌(首座)─승통(僧統)

선종: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

처음 승과에 합격하면 대덕이 되고 이후 수행 기간과 능력에 따라서 상위의 승계로 승진하였다. 교학 불교인 화엄종과 법상종의 승려는 교종의 승계를 받았고, 선종과 천태종의 승려는 선종의 승계를 받았다. 원칙적으로 승과에 합격한 승려만이 승계를 받고 사찰의 주지를 맡을 수 있었으며, 승계에 따라 주지로 임명될 수 있는 사찰의 규모에 차이가 있었다. 승계를 가지고 있는 승려는 관료와 같이 대우받았으며, 최고위 승계인 수좌와 승통, 선사와 대선사는 임명 절차나 대우 등에서 재상과 동등하였다. 한편, 승계를 가진 승려가 중요한 계율을 어길 때에는 승계는 물론 승려로서의 신분을 박탈하는 처벌을 받았다. 간통이나 위법 행위로 적발되면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개경에 거주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처벌 내용은 뇌물 수수나 횡령 등으로 적발된 관료에게 부과하는 것과 같았다.162)관료나 승려들을 평민으로 강등하여 지방에 거주하게 하는 것을 귀향형(歸鄕刑)·충상호형(充常戶刑)이라고 하였다(채웅석, 「고려시대의 귀향형과 충상호형」, 『한국사론』 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83 참조).

일반 승계 외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국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제도가 있었다. 왕사나 국사는 명망 있는 고승을 국왕이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 이들을 임명할 때에는 국왕이 직접 제자의 예를 표하였다. 왕사나 국사는 명예직의 성격이 강하였지만 때로는 직접 불교 정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국사가 왕사보다 높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왕사를 거친 후에 국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와 관련된 업무를 주관하는 관청으로는 승록사(僧錄司)가 있었다. 여기에서는 승려의 승적을 관리하고 승계 및 주지 인사 등을 집행하는 것은 물론 왕사·국사의 임명, 입적한 고승의 장례와 탑이나 비의 건립 등 승려와 관계되는 제반 사항을 처리하였다. 승록사는 좌가(左街)와 우가(右街)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관원은 승려를 임명하였다. 승록사의 고위 관직 체계는 다음과 같다.

(좌우)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

       ┎좌가: 도승록(都僧錄)─승록(僧錄)─부승록(副僧錄)─승정(僧正)

       ┕우가: 도승록─승록─부승록─승정

이상과 같이 고려에서는 승려, 특히 승과에 합격한 승려에게 관료와 비 슷한 신분을 부여하고 관료 체계와 같은 원리에 의해 운영하였다. 이를 통해 승려의 위상은 높아졌으며 신분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제도를 통해 승려가 국가 체제에 예속되는 모습도 나타났다. 승려에 대한 평가가 불교 내부의 기준이 아닌 국가가 정해 준 과거 시험 및 승계 제도에 따라서 결정되었으며, 승계의 상승 및 주지 임명을 둘러싸고 정치 세력과 영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무신 집권기에 일어난 결사 운동은 이러한 체제로부터 독립하여 승려의 본모습에 충실하자는 운동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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