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1. 숭불 정책과 종단 체제의 확립
  • 종단 체제의 정비와 발전
  • 9산 선문 체제의 성립과 선 사상의 동향
최연식

신라 하대에 급속히 퍼져 나간 선종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신라 말 사회 혼란기에 주로 지방 세력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던 선승들은 고려의 건국 이후에는 새로이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으면서 좀 더 안정된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지방 세력과 왕실을 연결하여 사회 통합을 촉진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선종이 수용되어 100여 년이 지나면서 명망 있는 선사가 대대로 배출 되고 이에 따라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유력한 산문(山門)이 생겨났다. 후대에 9산 선문(九山禪門)으로 불리게 된 것처럼 이들 유력 산문은 모두 아홉 개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이 이처럼 안정된 기반을 확립하게 된 것은 광종대를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9산 선문은 처음으로 남종(南宗)을 도입한 도의(道義)를 계승하는 가지산문(보림사), 도헌(道憲)을 개조로 하는 희양산문(봉암사), 홍척(洪陟)을 개조로 하는 실상산문(실상사), 혜철(慧徹)을 개조로 하는 동리산문(대안사), 현욱(玄昱)의 문도로 구성된 봉림산문(봉림사), 무염(無染)을 계승하는 성주산문(성주사), 범일(梵日)을 계승하는 사굴산문(굴산사), 도윤(道允)을 계승하는 사자산문(흥령선원), 이엄(利嚴)이 개창한 수미산문(광조사) 등이었다. 신라 하대에 활약한 대표적 선승이 개창자로 인정되었지만 후계자들이 번성하지 못한 혜소(慧昭), 순지(順之) 등의 산문은 9산 선문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가지산문, 봉림산문, 사자산문 등은 실제로는 체징(體澄), 심희(審希), 절중(折中) 등 개창조의 제자가 산문을 열었지만 이들이 개조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이는 선종에서 처음 법을 전수한 사람을 중시하기 때문인 듯하다. 다른 산문의 개창자에 비하여 활동 시기가 늦은 이엄이 산문의 개창자로 인정된 것도 그가 국내에서 선을 수학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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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의 차이에 의하여 오가(五家) 및 칠종(七宗)으로 구분되었던 중국의 선종과 달리 고려의 9산 선문은 사상의 차이보다는 인적인 계승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었다. 같은 산문에 속한 선승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중국에서 수학한 선풍은 각기 다른 경우가 많았고, 중국에서 같은 선승의 문하에서 수학한 사람이라도 귀국한 후에는 각기 다른 선문의 구성원이 되었다. 도헌을 개조로 하는 희양산문은 계보의 측면에서는 도헌을 중시하면서도 사상의 측면에서는 도헌이 수학한 북종선(北宗禪)보다는 후대의 제자들이 수학한 남종선(南宗禪)을 더 중시하였다. 이에 따라 도헌의 손제자인 긍양(兢讓, 878∼956)의 비문에는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도헌이 남종선을 수학한 스승의 밑에서 수학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163)도헌(道憲)의 선종 계보에 대하여 도헌의 비문에서 도신(道信, 중국 선종 제4조)─법랑(法朗, 이하 신라 승려)─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었다고 한 것과 달리 긍양의 비문에서는 혜능(惠能, 중국 선종 제6조)─마조 도일(馬祖道一)─신감(神鑑)─혜명(慧明, 신라 승려)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계승하였다고 하였다.

고려 건국 직후의 대표적인 선승으로는 일찍이 태조에 귀의하여 후원을 받았던 이엄(870∼936),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지어 주며 존숭하였던 충담(忠湛, 869∼940), 무염의 말년 제자로 태조의 존숭을 받았던 여엄(麗嚴, 862∼930)과 현휘(玄暉, 875∼941), 혜철의 손제자에 해당하는 경보(慶甫, 868∼948), 도헌의 손제자인 긍양, 현욱의 손제자인 찬유(璨幽, 869∼958)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선을 수학한 후에 다시 중국에 유학하여 새로운 선의 사조를 배우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에서 신라 선종의 기초가 되었던 마조 도일(馬祖道一) 계통과는 다른 청원 행사(靑原行思) 계통의 조동종(曹洞宗)을 수학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조동종의 개창자 동산 양개(洞山良价)와 조산 본적(曹山本寂)의 선풍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들보다 한 세대 전에 중국에 유학하였던 대통(大通, 816∼883), 순지 등은 위앙종(潙仰宗)의 개창자 앙산 혜적(仰山慧寂)의 문하에서 그 선풍을 배워왔으므로 고려 초에는 이미 다양한 종류의 선풍이 전해져 있었다. 순지는 875년(헌강왕 1)경에 귀국한 후 송악에서 왕건 집안의 후원을 받았으며 위앙종의 원상(圓相)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164)고려 후기에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일연 보(補))와 『종문원상집(宗門圓相集)』(지겸 집(集)) 등이 편찬되는 것으로 보아 조동종과 위앙종의 선 사상은 고려 선종 내부에 계승되어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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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 원종 국사 혜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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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선풍에 더하여 광종대에는 새롭게 법안종(法眼宗)이 들어와 크게 성행하였다. 법안종은 당시 중 국의 오월(吳越)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었는데, 광종대에는 이 지역과의 불교 교류가 활발하였다. 법안종의 개창자 법안 문익(法眼文益)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혜거(慧炬, ?∼974), 영감(靈鑑) 등을 통하여 법안종이 처음 소개된 이후 광종은 승과를 통해 선발된 선승을 오월 지방에 유학시켜 그 선풍을 배워오게 하였다. 중앙 집권을 추구하던 광종은 개인적으로 법안 문익의 손제자로서 교학 불교와 선종의 사상적 통합에 노력하던 영명 연수(永明延壽)의 사상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의 적극적인 법안종 수용 정책은 이런 관심의 발로였다. 이때 파견되었던 영준(英俊, 922∼1014), 지종(智宗, 930∼1018) 등은 영명 연수의 문하에서 법안종을 수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이 돌아온 직후 광종이 죽었기 때문에 크게 활약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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