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1. 숭불 정책과 종단 체제의 확립
  • 종단 체제의 정비와 발전
  • 화엄종의 정비와 발전
최연식

신라 하대에 대두된 의상계를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은 신라 말 선종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이 시기 화엄종은 내부적으로 정리된 교학 체계를 제시하지 못하였고, 외부적으로는 선종의 교학 비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교단 내부도 또한 남악파(南岳派)와 북악파(北岳派)로 분열되어 있었다. 즉, 해인사에는 화엄종의 종장인 희랑(希朗)과 관혜(觀惠)가 주석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각기 왕건과 견훤의 후원을 받으면서 대립하고 있었고, 그들의 문도대에 이르러서는 각기 북악파와 남악파로 나뉘게 되었다.165)『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제사입의정종분(第四立義定宗分).

이러한 분열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으며, 따라서 그 배경에는 단순한 후원자의 차이 이외에 사상적 차이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의상계와 비의상계, 혹은 의상계 내부의 사상적 갈등이었을 것이다.

고려 초에 활약한 대표적인 화엄종 승려로는 탄문(坦文, 900∼975)과 균여(均如, 923∼973)가 있다. 탄문은 고양의 지방 세력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 북한산 지역에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명성을 날려 왕건의 주목을 받았고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왕실의 배려로 신라 화엄학의 대가 신랑(神朗)을 계승하여 화엄종의 중심인물로 대두하였다. 광종대에는 왕사와 국사를 역임하고 보원사(普願寺)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균여는 황주의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개경 근처의 화엄종 사찰에서 수학하였다. 신라 이래의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여 당대 최고의 화엄학자로 명성을 날렸고 승과가 개설되었을 때에는 그의 이론이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동료와 함께 북악과 남악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양자의 차이를 해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가 화엄학자로서 명성을 얻은 후 광종은 그를 자신의 원찰인 귀법사에서 강의하게 하는 등 우대하였지만 반대자의 모함을 받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사건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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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지 법인 국사 보승탑과 탑비
보원사지 법인 국사 보승탑과 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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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는 의상·지엄·법장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註釋書)를 지었는데, 여기에는 의상계의 화엄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지엄과 법장의 교학을 참조한 그의 독자적인 교학 체계가 잘 나타나 있다. 균여의 화엄학 이론 중 대표적인 것은 『화엄경』의 가르침인 별교일승(別敎一乘)을 다른 경전의 가르침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한 교판론(敎判論)을 들 수 있다. 화엄학에서 일반적으로 일승(一乘)을 별교와 동교(同敎)의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화엄경』 이외의 경전에도 일승의 요소가 있다고 설명하려고 한 것과 달리 균여는 일승에는 별교의 성격만이 있다고 보고 동교는 불완전한 삼승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와 함께 자신의 몸을 통하여 모든 존재의 무애함을 체험하는 오척관법(五尺觀法)의 수행법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균여의 이론은 『화엄경』의 이론에 집중하면서 진리를 직접 체험할 것을 강조한 의상계 화엄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인 동시에 선종이 교학 불교를 비판하는 상황에서 『화엄경』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균여는 일반인의 신앙으로서 『화엄신중경(華嚴神衆經)』에 의거하여 화엄 신중들의 가호를 비는 신중 신앙을 중시하였고, 보현보살의 중생 구제를 노래한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지어 일반인에게 보현 신앙을 유포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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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 이후 왕실 출가 계보도
의천 이후 왕실 출가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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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가 이론적 기반을 마련한 화엄종은 이후 급속하게 주요 종단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결응(決凝, 964∼1053)은 의상의 가르침을 선양하며 부석사를 중창하였으며 1,000여 명이 넘는 문도를 두었다. 또 창운(昶雲, 1031∼1110)은 균여의 신중 신앙을 계승하여 『화엄신중경』의 주석서를 짓고, 혁련정(赫連挺)에게 균여의 전기를 짓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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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지 대각 국사비
영통사지 대각 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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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신분 출신 승려들의 등장도 화엄종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현종 왕비의 동생인 난원(爛圓, 1010∼1066)에 이어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이 화엄종 승려가 되었다. 11세에 출가한 의천은 13세에 승과를 거치지 않은 채 승통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화엄종을 주도해 갔다. 의천 이후 숙종, 예종, 인종 등도 자신의 왕자 혹은 종실을 화엄종 승려로 출가시켜 의천의 계보를 잇게 하였으며, 고위 관료의 자제 중에서 출가한 사람도 많았다. 한편, 문종은 자신의 원찰로 흥왕사를 창건하여 화엄종 사찰이 되게 하였고, 선종도 자신의 원찰 홍원사를 화엄종 사찰로 창건하였다. 고려 전기 화엄종의 주요 사찰은 흥왕사와 홍원사를 비롯하여 귀법사, 영통사, 부석사, 해인사, 화엄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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