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1. 숭불 정책과 종단 체제의 확립
  • 대장경 제작과 천태종 개창
  • 대장경의 제작
최연식

승정 제도 및 교단 체제의 정비와 함께 불교계의 사상적·문화적 역량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도 추진되었다. 그러한 노력 중 대표적인 것이 불교의 기본 문헌인 경·율·논(經律論)을 집대성한 대장경(大藏經)을 제작하는 사업이었다. 고려의 대장경 제작은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이 남쪽 지방으로 피난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한 발원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의 대장경은 10세기 중엽에 완성된 송나라의 대장경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168)개보장(開寶藏)은 한역(漢譯)된 불경을 집대성한 최초의 한문(漢文) 대장경으로 송나라 태조의 개보(開寶) 4년(971)에 관리들을 촉(蜀) 지방에 파견하여 목판본으로 제작하였다. 개보장에는 모두 1,078종 5,048권의 경전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당나라 때 만든 불경 목록인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따른 것이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대장경이 완성된 직후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대장경 인쇄본을 구해 왔고, 현종이 현화사를 창건하였을 때도 중국에서 대장경 한 질을 하사받아 봉안하였다. 현종대의 대장경 제작은 1029년(현종 20)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장경을 완성한 직후 국왕은 왕궁 안의 회경전(會慶殿)에서 대장경 완성을 기념하는 대규모의 장경 도량(藏經道場)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대장경 제작은 이것으로 완료되지 못하였다. 새로운 경전들을 대장경에 추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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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초조본(初雕本)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15권 표지
초조대장경 초조본(初雕本)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15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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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권수(卷首)
초조대장경 권수(卷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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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권말(卷末)
초조대장경 권말(卷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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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에서는 대장경을 만든 이후에 번역된 경전들을 차례로 대장경에 추가하였고, 거란에서도 송나라의 대장경보다 많은 분량의 거란 대장경을 제작하였다. 거란의 대장경은 성종(聖宗, 재위 983∼1031) 후반에서 흥종(興宗, 재위 1031∼1055)에 걸쳐 제작되었는데, 고려와 마찬가지로 송나라의 대장경을 모델로 하면서 여기에 독자적으로 파악한 다수의 경전을 추가하였다. 이처럼 송나라와 거란에서 기존의 대장경에 새로운 경전을 더 넣는 상황에서 고려도 현종대에 제작한 대장경에 새로운 경전을 추가하기 시작하였다. 추가로 대장경을 판각하는 사업은 거란의 대장경이 수입된 1063년(문종 17)에 시작되어 1087년(선종 4)에 완료되었는데, 이때에는 송나라와 거란에서 추가한 경전과 고려에서 발견된 경전을 검토하여 더해 넣었다. 현종대부터 1087년까지 제작된 대장경은 총 6,000여 권의 분량(570질)으로 당시 동아시아에서 제작한 대장경 중 가장 잘 갖춰진 것이었다. 완성된 대장경 판목은 흥왕사의 대장전에 봉안하고 있다가 후에 좀 더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내륙의 팔공산 부인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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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 모란당초문 경함(螺鈿牧丹唐草文經函)
나전 모란당초문 경함(螺鈿牧丹唐草文經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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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을 물리치기 위한 신앙심에서 처음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이야기되지만 대장경의 제작은 그러한 정치적 목적 이외에 불교 국가로서의 문화적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송나라는 처음 대장경을 제작한 이후 주변 국가에 인쇄본을 하사함으로써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였는데, 이제 고려도 독자적인 대장경을 갖게 되어 더 이상 중국의 대장경에 의존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스스로의 문화적 역량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승려들이 중국으로 유학 가는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경전의 구입이었는데, 이제는 불경을 집대성한 대장경판을 보유하게 되어 그렇게 할 필요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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