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1. 숭불 정책과 종단 체제의 확립
  • 대장경 제작과 천태종 개창
  • 교학의 발전과 교장 제작
최연식

대장경의 제작과 함께 불교학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되었다. 특히, 교학 불교인 법상종과 화엄종에서는 교단 체제가 정비되면서 자기 종파의 교학적 기반에 대한 연구가 한층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기 종파의 기초 문헌을 정리하여 간행하고, 나아가 종파의 사상적 전통을 재인식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법상종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사람은 문종의 처남으로 승통에 오른 소현이었다. 11세에 출가한 소현은 1069년(문종 23)에 승과에 합격한 이후 해안사, 금산사, 현화사 등 법상종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법상종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금산사에 있을 때에 금산사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치하여 유식학 문헌을 수집한 다음 정리하고 간행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현화사에 주석할 때까지 이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가 노년까지 수집하고 교정하여 간행한 유식학 문헌은 32종 353권에 달하였다. 한편, 그는 법상종 역대 조사의 현창에도 노력하였다. 광교원 내부에 법당을 마련하고 노사나불상과 함께 중국 법상종의 시조인 현장과 규기의 상을 봉안하여 모셨으며, 현화사에 주지할 때에도 법당 내부에 석가여래와 현장, 규기 및 해동의 법상종 조사 여섯 명의 모습을 모시고 승려들로 하여금 공경하게 하였다.169)정황선(鄭晃先) 찬, 「금산사혜덕왕사비(金山寺慧德王師碑)」. 이때 모신 해동 6조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 비문에 특별히 신라의 법상종 조사로 원효와 태현을 언급하고 있어 두 사람이 6조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균여 이후 화엄종에서 교학의 발전을 주도한 사람은 의천이었다. 왕자로서 처음 승려가 된 그는 고귀한 신분임에도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품고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불교 이론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좀 더 깊은 공부를 위하여 송나라로 유학할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송나라와 대립하는 거란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을 고려한 왕실과 관료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이에 의천은 1085년(선종 2) 비밀리에 송나라로 건너가 14개월간 화엄학을 비롯하여 천태학, 유식학, 선 등 주요 불교 이론을 배우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후 의천은 종래의 고려 화엄학과는 다른 교관겸 수(敎觀兼修)의 수행법을 강조하였다. 즉, 화엄학이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법계연기(法界緣起)를 해명하는 교학(敎學)에 머물면 불교의 진정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며 심성(心性)의 본래 모습을 체득하는 관행(觀行)을 닦아야만 진정함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의천은 교학과 관행을 같이 닦는 교관겸수가 화엄 학자에게 필수적인 수행법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입장에서 당시 고려 화엄학의 중심이 되고 있던 균여의 교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170)의천(義天),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권16, 「시신참학도치수(示新參學徒緇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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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관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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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유학하기 이전에 의천은 균여의 교학을 공부하여 높게 평가하였지만 유학 이후에는 균여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졌다. 균여는 교학에만 머물고 관행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제대로 된 이론을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물론 균여도 자신의 신체의 구성과 작용을 분석하여 화엄의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법계연기를 체득하는 오척관법의 관행을 닦을 것을 주장하였지만 의천이 볼 때 이러한 관행은 자신의 본원적 심성을 체득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교관겸수를 중시한 의천의 입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로 불리던 징관(澄觀)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당나라 후기에 활약한 징관은 화엄학과 함께 선과 『기신론』 등을 수학한 후 초기의 화엄 사상가에 비하여 일심(一心)의 체득을 강조하는 교학 체계를 수립하였고, 이러한 징관의 이론은 당시 중국 화엄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송나라를 비롯하여 거란의 화엄종에서는 징관의 교학을 정통으로 중시하였고, 화엄학의 이론에 대한 이해도 주로 징관의 『화엄경소』에 의거하고 있었다. 의천이 송나라에서 스승으로 모신 정원(淨圓)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의천은 단순히 송나라 화엄학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당시 송나라 화엄종에서는 징관의 교학 이상으로 교종과 선종의 일치를 주장하는 종밀(宗密)의 이론을 중시하였는데, 의천은 종밀의 이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선종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171)의천은 선종 승려들이 교학을 중시하지 않는 태도를 비판하였고, 천태종을 개창하였을 때에는 선종 승려 다수를 천태종으로 개종시켰다. 이러한 의천의 태도는 화엄종 조사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의천의 스승 정원은 인도 이래 화엄종의 조사를 화엄 7조(華嚴七祖)로 설정하였는데 여기에는 징관과 함께 종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귀국한 이후 의천은 이를 모델로 하여 홍원사에 구조당(九祖堂)을 세우고 인도와 중국의 화엄종 조사들을 모셨는데, 여기에 징관은 포함되었지만 종밀은 누락되었다. 대신 종래 의상계 화엄종에서 중시한 지론종(地論宗)의 조사들을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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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화엄칠조탱
용문사 화엄칠조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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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화엄 7조: 마명(馬鳴)─용수(龍樹)─두순(杜順)─지엄(智儼)─법장(法藏)─징관─종밀

의천의 화엄 9조: 마명─용수─세친(世親)─불타삼장(佛陀三藏)─혜광(慧光)─두순─지엄─법장─징관

의천의 교관겸수 주장은 송나라 유학을 통하여 습득한 것인 동시에 심성의 체득을 중시한 자신의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점은 일심을 강조한 원효를 그가 중시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의상계의 사상을 계승한 균여의 교학에서는 원효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천은 원효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의상과 함께 신라 화엄종의 개창자로 존숭하였다.172)의천의 입적한 직후에 원효와 의상을 각기 화쟁(和諍) 국사와 원교(圓敎) 국사로 추증하고 비석을 건립하게 하였는데, 이는 의천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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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 국사 비명 탁본
대각 국사 비명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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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은 화엄학만이 아닌 불교학 전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여러 불교 연구서를 총괄한 교장(敎藏)을 편집·간행하였다. 교장은 불경에 대한 각종 연구서의 모음으로, 불경을 모은 대장경에 대한 해설서들이라는 의미에서 속장(續藏) 또는 속장경이라고도 한다. 의천은 유학 가기 전부터 불경 주석서를 모아 교장을 편집할 것을 발원하였는데, 귀국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그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유학 중일 때에 여러 종파의 연구서 3,000여 권을 수집하였고, 송나라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국내의 사찰을 뒤져 옛 문헌을 찾고 또 송나라, 거란, 일본에 사람을 파견하여 문헌을 수집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090년(선종 7)에 확인된 불경에 대한 주석서를 경전별로 분류한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3권을 완성하였는데, 여기에는 총 1,010종 4,857권의 문헌이 수록되었다.

곧이어 의천은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이 문헌들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교장의 간행에는 다른 종파의 승려도 참여하였는데, 특히 법상종 승려가 많았다. 법상종의 소현이 간행한 유식학 문헌도 교장의 일부로 수록되었다. 교장 간행 작업은 의천이 입적한 이듬해인 1102년 (숙종 7)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때 간행된 책은 송나라, 거란, 일본에 전해져 각 나라의 불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의천은 교장 이외에도 화엄종의 주요 문헌을 발췌하여 편집한 『원종문류(圓宗文類)』 22권과 불교 승려의 비문 등을 모은 『석원사림(釋苑詞林)』 250권을 편집하는 등 불교 문헌의 수집과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가운데 『원종문류』 3권과 『석원사림』 5권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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