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2. 불교 개혁의 시도와 좌절
  • 결사 불교의 등장과 발전
  • 지눌과 수선사
최연식

수선 결사(修禪結社)는 보조(普照) 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시작하였다. 하급 관료 집안 출신인 지눌은 어려서 사굴산문으로 출가하였고, 1182년(명종 12)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창평의 청원사(淸源寺)에 머무를 때에 혜능(慧能)의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고서 진성(眞性)에 대하여 깨달음을 얻고, 3년 후에는 하가산 보문사에서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읽고 그러한 깨달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리고 1197년(명종 27)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수도하던 중 대혜 종고(大慧宗杲)의 『보각 선사어록(普覺禪師語錄)』에 나오는 “선(禪)은 고요한 곳에 있지 않으며 또한 소란한 곳에 있지도 않다. 일상의 인연을 좇는 곳에 있지 않고, 또한 생각으로 분별하는 데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먼저 고요한 곳, 소란한 곳, 일상의 인연을 좇는 곳,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선해야 홀연히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집 안의 일임을 알게 되리라.”라는 구절을 보고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얻었다.183)김군수(金君綏) 찬, 「수선사불일보조국사비(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 이후 지눌은 이러한 깨달음의 입장에서 자신의 선 사상을 체계화하고 교화를 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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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국사 진영
보조 국사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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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이 결사를 처음 시작한 때는 1190년(명종 20)이었다. 이때 지눌은 평소 세속의 명리를 떠나서 수행에 매진하자고 약속하였던 동료 득재(得才)의 초청으로 팔공산 거조암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짓고 선종과 교종의 승려는 물론 유교, 도교의 사람까지 포괄하는 수행 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사의 이름인 정혜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으라고 이야기한 『육조단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1200년(신종 3)에 좀 더 넓은 곳을 찾아 송광산 길상사(지금의 송광사)로 옮기고는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폈다. 1205년(희종 원년)에는 산과 결사의 이름을 조계산과 수선사로 바꾸었다.184)송광산 근처에 정혜사(定慧寺)가 있었기 때문에 이름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수선사(修禪社)로 바꾸면서, 산의 이름도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개창자 혜능(慧能)이 주석하던 산의 이름을 따서 조계산(曹溪山)으로 바꾸었다.

수선사는 지눌의 제자인 혜심(慧諶, 1178∼1234)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혜심은 본래 국자감에서 유학을 공부하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1202년(신종 5) 지눌의 문하로 출가하였다. 이후 지눌의 계승자로 인정받고 지눌이 입적한 이후에는 수선사의 제2세 사주가 되어 스승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가 사주로 있는 동안에 수선사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으며 후원자도 늘어났다. 지눌대에 수선사를 후원한 이들은 지방의 향리층이었지만 혜심대에는 왕실과 고위 관료가 주된 후원자였다. 특히 당시 무인 집정자 최우(崔瑀)는 혜심을 신뢰하여 수선사에 후원을 많이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그 문하에 출가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왕실과 고위 관료의 후원을 얻었던 혜심은 승과를 거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1216년(고종 3)에 대선사라는 최고위의 승계를 받기도 하였다.185)이규보(李奎報) 찬, 「조계산제이세진각국사비(曹溪山第二世眞覺國師碑)」. 당시 혜심에게 수여되었던 대선사고신(大禪師告身)이 현재 송광사에 전해지고 있다(노명호 외, 『한국 고대 중세 고문서 연구』 상,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56∼62쪽, 혜심고신(慧諶告身) 참조). 혜심대 이후 수선사는 최씨 무신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불교계 최고의 위상을 계속하여 유지해 갔다. 특히, 몽고의 침입을 맞아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최우는 강화도에 자신의 원찰인 선원사(禪源社)를 세우고 그 사주로 수선사 출신을 임명하였다. 이 뒤부터 수선사 사주의 제자가 선원사 사주를 맡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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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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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사의 사상 전통은 지눌의 가르침에 입각하였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지눌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스님은) 늘 사람들에게는 『금강경』을 읽으라고 권하였고, 가르침은 늘 『육조단경』에 의거하면서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 종고의 『어록』으로 보충하였다. 수행법으로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看話)경절문(徑截門)이다.

지눌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던 혜능, 이통현, 대혜 종고의 사상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폈고 이것이 수선사의 사상 전통이 되었다. 그가 구체적 수행법으로 제시한 삼문(三門) 중 성적등지문은 혜능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정과 혜를 함께 닦을 것을 이야기한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중생이 본래 성불한 존재라고 하는 이통현의 사상에 의거한 것으로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자는 가르침이다. 또한, (간화)경절문은 대혜 종고의 간화선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하여 단박에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었다. 지눌의 주요 저술인 『수심결(修心訣)』,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등에는 이러한 수행법과 함께 먼저 자신이 부처인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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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눌은 당시 널리 신앙되고 있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 신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모든 것은 진성(眞性)의 발현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서방 세계에 극락을 상정하는 것은 단지 방편적인 가르침으로 수행자가 추구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지눌 이후의 수선사 승려는 이러한 지눌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해 나갔다. 특히, 혜심은 지눌이 최상 근기(根機)인 사람을 위해 제시한 간화선의 경절문 수행법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화두 참구(話頭參究)를 위한 공안(公案)을 모아 놓은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편찬하고 화두 참구의 구체적 방법을 이야기한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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