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2. 불교 개혁의 시도와 좌절
  • 결사 불교의 퇴조와 배불 사상의 등장
  • 고려 말 불교계의 동향과 배불론의 등장
최연식

13세기 말에 몽산 덕이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널리 확대된 간화선 수행법은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려 불교계의 전반적인 경향으로 자리 잡아 갔다. 몽산이 법어에서 강조한 무자 화두 참구와 본분종사로부터의 인가라고 하는 것은 이제 선종 승려만이 아니라 다른 종파 승려에게도 가장 일반적인 깨달음의 과정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공민왕대에 국사로 임명된 천희(千熙, 1307∼1382)는 화엄종 승려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여러 명산을 찾아다니며 선지(禪旨)를 참구하였고 꿈에 몽산 덕이로부터 의발을 전해 받은 것을 계기로 중국에 유학하여 휴휴암에서 몽산의 유품을 인가의 징표로 찾아왔다.203)이색 찬, 「창성사진각국사비(彰聖寺眞覺國師碑)」. 공민왕대에 간화선을 시험하는 공부선(功夫禪)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선종 승려와 함께 교종 승려도 참여하였다.

원나라의 지배하에서 다른 중국의 전통적 종파가 쇠퇴하는 가운데 선종만이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던 것도 고려에 간화선이 성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중국에 유학하여 정통 조사로부터 인가를 받아 온 승려는 남다른 권위를 가질 수 있었으므로 종파에 관계없이 수많은 승려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이들은 대부분 고려와 빈번하게 왕래하는 강남 지방에서 임제종 선사로부터 선법을 배우고 인가를 받아 왔다.

간화선풍이 불교계의 일반적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재가 신자의 화두 참구도 성행하였다. 이승휴가 몽산 덕이로부터 법문을 받은 이래 고위 관직을 지낸 권단(權㫜)은 철산 소경이 고려에 왔을 때 제자로 출가하여 간화선 수행을 하였고, 원 간섭기 권문이던 채홍철(蔡洪哲)은 자신의 집에 전단원(栴檀園)이란 참선 도량을 개설하고 선승을 초빙하여 함께 무자 화두를 참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귀족 자제가 선종으로 출가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났다. 이제 선종은 명실상부한 불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교학 불교의 승려도 참선을 위주로 하면서 선종과 교종의 구분이 약화되었다. 본래 선문의 규범으로 정해진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원나라에서 수입되어 불교 사원 전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종파를 넘나드는 승려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승과나 승정에서의 종파 구분도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고려 말의 대표적 승려로는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와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8∼1374)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국에 유학하여 정통 임제종의 조사로부터 인가를 받아 왔다. 보우는 양근(양평 지역) 출신으로 어려서 가지산문에 출가하였다. 선 종 출신이지만 26세에 화엄종 승과를 보아 합격하였고, 그 후에는 다시 선종으로 돌아와 참선에 몰두하였다. 1337년(충숙왕 복위 6)에 채홍철의 전단원에 초청되어 무자 화두를 참구하다 첫 번째 깨달음을 얻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 1,700공안을 참구하였다. 그 후 다시 삼각산에서 수행하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그 경지를 ‘태고암가(太古庵歌)’로 노래하였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으로 들어가 당시 최고의 선승으로 추앙받던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태고암가를 보이고 인가를 얻었다. 그 뒤 연경에서 황제의 초청으로 영령사(永寧寺)에서 황태자를 축원하는 법회를 주재하고, 1348년(충목왕 4) 귀국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에 왕사로 책봉되었지만 신돈(辛旽)이 중용된 이후에는 그와 대립하여 밀려났다가 신돈이 실각한 이후에 다시 국사로 책봉되어 말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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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사 삼화상 진영
대곡사 삼화상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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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는 본래 화엄종 승과에 합격하였던 만큼 교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왕사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백장청규』를 도입하여 불교계를 정화할 것과 9산 선문을 비롯한 불교계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한양으로의 천도와 신돈 제거를 주장하는 등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여하였고 이로 인해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당대 최고의 선사로서 화두 참구에 의한 깨달음과 인가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간화선이 불교계의 중심으로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주로 고향 근처의 암자에 은거하였기 때문에 문도가 번성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는 임제종의 정통적 계승자로 추앙을 받았다.

혜근은 하급 관료 집안 출신으로 20세에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출가하였다. 1347년(충목왕 3) 회암사에서 수도하던 중 깨달음을 얻고 인가를 얻기 위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연경의 법원사에서 지공을 만나 가르침을 들었고 다시 강남 지방으로 가서 임제종의 고승들과 교류하였다. 이때 몽산 덕이가 머물렀던 휴휴암을 방문하였고 항주(杭州)의 정자사(淨慈寺)에서 평산 처림(平山處林)으로부터 인가를 얻었다. 이후 연경으로 돌아와 황제의 초대로 광제사(廣濟寺)에서 법회를 주재하였고 다시 지공을 만나 법을 계승받았다. 1358년(공민왕 7) 고려에 돌아와 공민왕의 원찰인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다가 신돈이 집권하자 물러나 각지를 유력하였다. 신돈이 실각한 이후에 다시 공민왕의 초청으로 회암사에 머무르게 되었고, 국왕의 요청으로 광명사에서 교종과 선종의 승려를 모아 간화선 시험인 공부선을 주재하였다. 1371년(공민왕 19) 왕사로 책봉되고 송광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이듬해에는 다시 회암사의 주지를 맡아 중창하고 스승인 지공의 유골을 이곳에 봉안하였다. 회암사의 중창은 지공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는데, 중창 공사가 마무리된 1376년(우왕 2) 나옹은 사대부들의 탄핵을 받아 지방으로 내려가다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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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 혜근 진영
나옹 혜근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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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근은 보우와 마찬가지로 화두 참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이를 중국의 본분종사로부터 인가받은 당대의 대표적 선승이었다. 또한, 왕실의 후원하에 공부선을 주재함으로써 간화선법의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그는 간화선법과 함께 고려 국내에서 특별한 존숭의 대상이던 지공의 무생계법도 계승하였고, 지공을 현창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후대에는 지공의 계승자로서 인정받았다. 교화에 힘써 출가와 재가의 제자가 많았는데, 환암 혼수(幻庵混修)와 무학 자초(無學自超) 등 조선 초 선종의 중심인물이 그의 계승자를 자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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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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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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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한의 출신과 초기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54세 되던 해(1351)에 중국으로 유학하여 석옥 청공과 지공에게 수학하여 인가를 받고 몽산 덕이가 머물렀던 휴휴암을 방문한 후 1년 만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에는 여러 사찰에 머물며 선법을 폈고 공민왕대에 공부선을 개최할 때에 혜근과 함께 시험관으로 참여하였다. 보우나 혜근과 달리 선의 수행에서 간화선법만을 내세우지 않고 다양한 수행법을 이야기하였으며, 무심(無心)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중시하였다. 역대 부처와 조사 가르침의 요체를 모은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편집하여 유포시켰는데, 그의 입적 후인 1377년(우왕 3)에 금속 활자로 간행된 것이 현존 최고의 금속 활자본이다.

불교계가 간화선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가운데 불교계 밖에서는 신진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여 새로운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회의 개혁을 위한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성리학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도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사찰이 왕실 및 권문세가와 결탁하여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는 상황 및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승려가 되어 수행자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중심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찰 재산의 축소와 엄격한 승려 자격의 심사가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안이 저항에 부딪쳐 실시되지 못하면서 점차 불교 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였다. 특히, 위화도 회군으로 사대부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사회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급진파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급진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불교에 대한 비판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들은 모든 사찰을 철폐하여 관청과 학교로 사용하고 승려는 환속시켜 군역(軍役)에 충당하자는 폐불론(廢佛論)을 주장하였다. 온건파와 급진파의 심각한 대립 끝에 급진파가 승리하여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폐불론은 사대부들 사이의 명분으로 확립되었다. 하지만 왕실의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와 전통적 신앙에 대한 민심 때문에 사대부들의 폐불 정책이 완전하게 실행될 수는 없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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