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 불교 신앙의 실제 모습
  • 보살 상주 신앙
강호선

불교 신앙의 발전은 고려 국토 내에 특정 보살의 상주처(常住處)를 상정하게 하였다. 강원도 낙산이 관음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으로 상정되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낙산은 통일신라 무렵부터 관음의 상주처로 알려져 있었다. 오대산 역시 통일신라시대 무렵부터 문수보살의 상주처로 상정되어 있었다.

금강산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의 상주처로 고려 초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금강산의 법기보살(담무갈보살)에게 경배하는 목각탱(木刻幀)이 고려 후기에 제작되는 등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금강산은 보 살의 상주처로 더욱 주목받았다. 원나라는 주로 고려의 명산대찰에서 불사를 설행했는데, 금강산은 『화엄경』에 나오는 담무갈보살의 상주처라 하여 무척 인기가 많았다. 원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승려까지도 금강산을 보고 싶어 할 정도였다. 일본 승려 천우(天祐)는 금강산의 신령하고 기이한 것이 천하에 이름이 나 있어 승려들이 이 산에 가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고 하며 공민왕에게 금강산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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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무갈지장보살 현신도
담무갈지장보살 현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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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 표훈사(表訓寺)는 금강산의 담무갈보살이 동북편 봉우리에 머물고 있다고 하여 법기(法起)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법당인 반야보전(般若寶殿) 내부에도 법기보살상을 여섯 개 안치하였고 불상들은 법당 동쪽의 법기봉(法起峰)을 향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228)국립 중앙 박물관, 『아름다운 금강산 유리 원판 사진』, 국립 중앙 박물관, 1999, 152쪽. 금강산 법기보살에 대한 원나라 황실의 신앙은 금강산 일대 사찰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황제의 사신이 금강산으로 향과 폐백을 가지고 오는 것이 길에 연이을 정도였다고 한다.229)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권3, 「창치금강도산사기(刱置金剛都山寺記)」. 그중에서도 표훈사는 원나라 영종(英宗)과 태후·태자 등이 시주하여 크게 중창하였는데, 순제(順帝) 때에는 향로와 향합을 하사하였고, 각종 법회와 반승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1434년(충혜왕 후 4) 고려 출신으로 순제의 황후가 된 기씨(奇氏)가 황제와 황태자를 위해 장안사(長安寺)를 크게 중창하였다. 고려 승려 굉변(宏卞)이 담무갈보살에게 장안사를 중흥할 것을 맹세하고 불전을 수리하고 빈관(賓館)과 승방(僧房)을 완성해 가던 중 비용이 부족하자 연경으로 갔다. 이 일은 곧 기황후(奇皇后)에게 알려졌고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의 노력으로 원나라 황실에서 장안사를 지원하게 되었다. 기황후는 공인(工人)을 보내 절을 중창하며 3년에 걸쳐 해마다 절의 상주 비용을 지속적으로 시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안사에 은으로 쓴 대장경을 하사하기도 하였다.230)이곡, 『가정집』 권6, 「금강산장안사중흥비(金剛山長安寺重興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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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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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최해(崔瀣, 1287∼1340)는 보덕사(報德寺)·표훈사·장안사 등 금강산 안에 있는 절들이 관의 힘을 빌려 건립한 웅장한 전각들이 산골짜기에 가득 차고 금벽이 휘황하고 재물을 맡은 창고와 보물을 맡은 관이 있을 정도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금강산을 사랑하는 것은 보살이 머물기 때문이며, 보살을 공경하는 것은 사람을 복되게 해주기 때문인데 승려들이 금강산을 팔아서 제 배만 불린다고 비판하였다.231)최해(崔瀣), 「송승선지유금강산서(送僧禪智遊金剛山序)」, 『동문선』 권84. 최해의 글을 통해 고려 말까지도 금강산은 보살의 상주처로 사람들에게 두루 신앙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담무갈보살의 상주처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금강산에 대한 불교 신앙적인 관심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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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훈사 반야보전
표훈사 반야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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