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 불교 신앙의 실제 모습
  • 관음 신앙
강호선

관음 신앙은 관음의 성격상 다른 여타의 불교 신앙보다 현세 이익적인 면이 강하다. 관음(觀音)의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아발로키테쉬바라(Avalo-kitasvara)인데,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자재(觀自在) 등으로 한역(漢譯)된다. 여러 법을 관찰할 수 있고 자유자재하다는 의미인데, 모든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고 안락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오래전부터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일심으로 관음의 이름을 부르면 관음은 그 음성을 듣고 곧 몸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중생을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복덕을 얻게 해준다고 믿었다. 관음에게 기도하면 큰 불이나 수난(水難), 해난(海難), 도해(刀害)를 면하게 해주고 야차의 재난이나 도둑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음욕(淫慾) 등에서도 벗어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식을 얻게 해주고 복덕을 나누어 주는 등 광범위하게 현세 이익적인 소망을 들어준다 하였다. 이처럼 관음은 큰 자비심을 갖고 중생의 모든 고난을 구제하고 복덕을 나누어 안락한 세계로 인도해 주는 존재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는 대승 불교의 이상을 가장 잘 실천하는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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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사 전경
장안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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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음의 능력으로 인하여 관음은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몸을 바꾸어 나타나는 신통력이 있다. 그리하여 왕, 여인, 소년, 승려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관음에 대한 이러한 관념에서 변화 관음이 성립하였으며, 밀교 신앙과 결합하면서 변화 관음의 모습은 더욱 다양해졌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는 실제 도상으로 나타나거나 신앙되는 변화 관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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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관음보살 좌상
금동 관음보살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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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설행되고 있었는데, 고려에 들어서면 전 시대에 비해 다양한 관음 도상(觀音圖像)이 조성되었고, 중국에서 유입된 티베트 밀교(西藏密敎) 등의 영향으로 주술적인 면도 두드러지는 변화가 나타난다. 고려의 관음 신앙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일부 감응담(感應譚)과 함께 『고려사』 등의 기록과 문집, 불교 관련 저술 등에서 확인된다.

균여(均如)는 손위 누이와 법담을 하는 과정에서 누이에게 보현과 관음 두 지식품(知識品)의 법문과 신중(神衆)과 천수(千手) 두 경문(經文)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232)이만, 「고려시대의 관음 신앙」, 『한국 관음 신앙 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8, 145쪽. 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천수경』은 이 시기부터 이미 천수관음을 신앙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 불교에서는 관음 신앙이 유행하였으며, 전 시대에 비해 관음의 응신 (應身)이 다양해진 것은 분명하나 천수관음 신앙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바가 없어 고려시대 관음 신앙에서 천수관음에 대한 설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균여의 사례와 파리 기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 천수관음보살상이나 호암 박물관에 있는 천수천안관음도(千手千眼觀音圖) 등을 통해 볼 때 고려시대에도 천수관음이 신앙되었고 그에 따른 상이나 그림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다수 조성된 수월관음도는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한 관음 신앙의 일면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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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관음보살상
천수관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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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충렬왕대 이후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티베트 밀교의 영향으로 육자주(六字呪)와 염송(念誦)이 널리 유행하여 사원, 석탑, 불구 등에 이르기까지 육자진언(六字眞言)의 인각(印刻)이 두드러졌고, 진언과 관련된 불서의 간행도 시작되었다. 특히,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觀世音菩薩滅業障眞言) 같은 것은 우리나라의 의식에만 있는 특수한 형태의 진언이다.233)이만, 앞의 글, 145∼146쪽.

이렇게 관음 신앙은 밀교와 융합되기도 하였고, 화엄 신앙과 융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후기 혜영(惠永)과 체원(體元)에게서 잘 나타난다. 충렬왕 때의 법상종 승려 혜영이 저술한 『백의해(白衣解)』는 보타락가산에 있는 백의관음에 대한 예참문(禮懺文)으로 정토왕생을 바라는 글이지만 역병(疫病), 도병(刀兵), 액난(厄難), 재난(災難) 등의 소멸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또한, 혜영은 소(疏)를 지어 소재(消災), 인왕법석(仁王法席), 천수법석(千手法席) 등을 베풀기도 하였다.234)이만, 앞의 글, 146∼147쪽.

충숙왕과 충혜왕 때 활동한 화엄 승려 체원은 의상의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에 주석을 하여 약해(略解)를 저술하였는데, 내용은 백화 도량에 머물면서 보살행과 보살도로 표방되는 관음보살에게 발원하는 것이다. 체원은 『화엄경』의 관음 신앙에 깊은 믿음을 갖고 있는, 가형(家兄)인 승려 인원(忍源)의 우애에 보답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235)채상식, 『고려 후기 불교사 연구』, 일조각, 1991,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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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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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원은 『화엄경』의 관음 신앙과 관련된 영험담(靈驗談)을 위주로 하는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도 저술하였는데, 당시 고려 사회에 신비적인 영험 신앙이 유행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체원은 의상 이래 화엄종의 실천 신앙적인 면을 계승하면서도 영험이라는 신비적인 면을 통해 강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공덕소경(功德疏經)』에서는 기층 사회의 전통적 민간 신앙을 화엄종의 염불 신앙에 수용·결합하려는 의도도 나타난다.236)채상식, 앞의 책, 212∼218쪽. 이러한 체원의 모습은 고려 후기 관음 신앙이 화엄종에 수용된 양상을 잘 드러내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에는 화엄 승려뿐만 아니라 선승도 관음상에 발원하였다. 태고 보우(太古普愚)는 용문산(龍門山) 상원암(上院庵)에서 관음보살에게 12대원을 발원하였으며,237)보우(普愚),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권하,『한국 불교 전서(韓國佛敎全書)』 6―696상. 나옹 혜근(懶翁惠勤)도 관세음보살처럼 시방세계에 두루 나타나서 관음의 이름만 들어도 삼악도(三惡道)를 면하게 하고 형상만 보아도 해탈하게 하리라는 발원문을 남기기도 하였다.238)혜근(慧勤), 「나옹화상가송(懶翁和尙歌頌)」, 『한국 불교 전서』 6―646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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