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3장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적 확대
  • 3. 불교 사상과 신앙의 사회화
  • 불교 신앙의 실제 모습
  • 상례와 불교
강호선

일상생활에서 종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죽음과 관련된 의식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 두려움, 불확실성은 불교에 있어서는 우란분재나 사십구재와 같은 여러 가지 의식과 지장보살, 시왕 같은 각종 신격(神格)을 만들어 내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상 례도 불교의 영향력 아래에서 설행되었다. 고려시대에 일반 백성까지도 상례를 불교 중심으로 진행하였는지는 현전하는 자료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다만 1123년(인종 1)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의 기록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은 들 가운데 시체를 버려두고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 둔다 하였다.239)서긍(徐兢), 『고려도경(高麗圖經)』, 권22, 잡속(雜俗)1. 서긍이 목격한 것으로 볼 때 일반인들에게는 이때까지도 일종의 풍장(風葬)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승려는 당연히 불교식 상장례를 이용하였을 것이므로 논할 여지가 없지만, 왕실과 일반 관료에 대한 기록을 통해 볼 때 고려에서 상례를 치를 때에는 불교를 중심에 두고 진행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것으로 고려 사회의 상례를 유추할 수 있다.

확대보기
오원경 묘지명
오원경 묘지명
팝업창 닫기

고려시대에는 유교와 불교의 의례가 함께 수행되어 승려가 유교적 제(祭)나 삼년상을 따르기도 하였고, 관료나 유자(儒者)가 사찰에서 화장을 하고 원당에서 명복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현전하는 묘지명(墓誌銘)은 고려시대 망자의 상례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 묘지명을 남긴 이들은 당연히 관료, 귀족, 왕족, 승려 등 식자층으로 국한된다.

정목(鄭穆)의 묘지명에 의하면 1105년(숙종 10) 용흥사(龍興寺) 덕해원(德海院)에서 정목이 사망하자 불교식 제도를 따라 절의 서쪽 언덕에서 화장하였다고 하는데,240)김용선 편저, 「정목 묘지명(鄭穆墓誌銘)」, 『고려 묘지명 집성』,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7, 36쪽. 당시의 상례가 불교 의식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1077년(문종 31)에 세상을 뜬 선종의 장인 이정(李頲)의 묘지명은 불교식으로 거행된 당시의 상례를 잘 보여 준다.241)김용선 편저, 「이정 묘지명(李頲墓誌銘)」, 앞의 책, 29쪽. 이정이 아미타불을 염불하고 보살 팔계(菩薩八戒)를 받고 죽자 시신을 다비하고 나서 6개월 뒤에 재매장하였다. 그동안 자손들은 유해를 절에 안치하고 제사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제사는 결국 절에서 설행하는 불사로 이루어졌음은 당연하다.

이러한 불교식 상례는 이정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서 확인된다. 진중명(秦仲明)은 1137년(인종 15)에 사망하여 대덕산(大德山)에 장례 지냈는데 이때에는 아들 건(蹇)이 어렸기 때문에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다가 아들이 장성하자 1150년(의종 4)에 임강현(臨江縣) 생천사(生天寺) 북쪽 산기슭에서 화장하였다고 한다. 진중명의 묘지명에는 이때 화장한 것을 일러 예(禮)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242)김용선 편저, 「진중명 묘지명(秦仲明墓誌銘)」, 앞의 책, 119쪽. 이정의 경우에도 화장을 하고 절에 잠시 안치하였다가 다시 매장한 것을 일러 ‘예(禮)’라고 표현하였다.

확대보기
허재 석관
허재 석관
팝업창 닫기

앞의 대표적인 두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시대의 장례법은 사망한 뒤에 화장을 하고, 유해를 절에 잠시 안치하였다가 몇 개월 뒤(보통 3개월여 후) 장사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매장하였던 유해를 다시 꺼내어 화장하여 새로 매장한 진중명의 사례는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사찰에 유해를 봉안하는 것이 고려 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상례법이었음을 잘 반영한다.

유해가 사찰에 잠시 안치되는 동안 사찰에서는 각종 추모 의식이 진행되었을 것인데, 어떤 의식이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화녕(李和寧)이 돌아가신 장인을 천도하는 글에서 예법대로 기곡(箕谷)의 남쪽에 장사하고 정성껏 취봉(鷲峰)의 절에서 천도한다고 한 것을 보면243)이첨(李詹), 「대이화녕천망구소(代李和寧薦亡舅疏)」, 『동문선』 권111. 죽은 후 망자를 위하여 천도재(薦度齋)를 열었던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천도재로는 사십구재, 수륙재, 우란분재 등이 있는데 사찰에 임시로 봉안되었던 기간이 대개 3개월 정도이며, 칠칠재(七七齋)나 백일재(百日齋)와 관련된 글이 많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사찰에 봉안하면서 백일재까지를 설행한 뒤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제사도 불교식으로 사찰에서 거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유씨(兪氏) 성의 승상은 졸곡(卒哭)도 사찰에서 불사를 베풀고 차를 공양하였으며, 권일재(權一齋)는 세상을 뜬 어머니의 졸곡 때 용천불사(龍泉佛寺)에 가서 재계(齋戒)를 하여 복을 빌고, 다과(茶果)로 공양하는 불교식 제례를 따랐다.

확대보기
최문도 묘지명
최문도 묘지명
팝업창 닫기

형편이 여의치 않아 그냥 매장하였던 시신을 사정이 허락되자 다시 화장한 진중명의 경우나 임종하면서 불가(佛家)의 다비법, 즉 화장을 따르도록 유언을 남긴 이자연(李子淵)의 경우처럼 고려 사회에 일반적으로 행하던 불교식 장례법과 자연스럽게 그에 수반되었을 불교식 제사 의례는 고려 말 성리학의 도입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1365년(공민왕 14) 사망한 노국 대장 공주를 공민왕은 불교 법식대로 화장하려다가 유탁(柳濯)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244)『고려사』 권111, 열전24, 유탁(柳濯)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은 화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윤택(尹澤, 1289∼1370)은 구기(拘忌)에 얽매어 불교 방식으로 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245)김용선 편저, 「윤택 묘지명(尹澤墓誌銘)」, 앞의 책, 195∼196쪽. 그의 아들 윤구생은 사우(祠宇)를 설치하고 절기에 따라 선조와 3대를 제사하는 등 철저하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여 설행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 불교식 화장은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고, 조선 건국과 함께 화장이 법적으로 금지되면서 매장하여 유교식으로 상장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갔다.

고려시대에 불교식 화장이 성행하였던 것이나 조선시대에 법으로 화장을 금하였던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종교·신앙이나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상례는 이후 망자를 추모하는 행사인 제례와도 짝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식 상례가 일반적이었다는 것은 고려 사회의 제례도 불교식으로 사찰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